1964년 12월, 당시 중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치러진 시험문제 중 ‘자연’ 과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엿을 만들기 위해 넣는 것으로 적합한 것은?” 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러나 다른 보기 중 하나였던 ‘무즙’, 이 예시가 문제였다. 무즙 안에 들어있던 ‘아밀라아제’. 아밀라아제를 상품화시킨 이름이 ‘디아스타아제’였던 것이다. 여러 종류의 아밀라아제를 총칭하는 이름이 바로 디아스타아제다. 즉 상위 개념이면서 상품화 된 (규격화 된) 정답이 있었다. 문제를 제출한 교육부는 큰 난관에 봉착했다. 출제의도와 다르게 중복된 답이 나왔으니 말이다. 출제위원회는 ‘1가지의 정답’만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즙을 선택한 지원자들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출제위원회는 문제를 없애버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모든 학생에게 1점의 가산점을 주기로 한다. 1차원적인 해결방식이다. 당연히 ‘디아스타아제’만 선택한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1점은 지금의 중학교 입시와는 다르게 등락을 결정짓는 ‘한 끗’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가는 것은 지금처럼 평준화되고 의무교육의 범주 하에서 자연스럽게 진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019년 현시점의 대학입시와 비슷한 지원제 형태였다. 무즙과 엿기름의 전쟁, 아니 정확하게는 ‘무즙을 선택한 수험생의 어머니’와 ‘엿기름을 선택한 어머니’ 의 전쟁, 그리고 전쟁을 촉발한 교육당국의 면피성 행동이 어우러진 총칼 없는 전쟁 이였다. 당시 명문 중학교의 입시는 명문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계급화의 시작을 의미했다. 2019년 지금의 ‘서울대-연고대-서성한’으로 축약되어 불리는 속칭 상위권 대학교들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70년대 시절을 보낸 지금의 사회지도층 혹은 기득권들의 끈끈한 카르텔로 불리는 경기고-서울고 등등의 고등학교 출신. 명문대 그리고 예전에는 명문고라고 불리었던 두 집단의 명찰값은 여타의 학교들과는 다르게 느껴지고 작동했다. 기시감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대학교가 고등학교로 대변 치환 된 것 일뿐, 예나 지금이나 같은 땅에서 살아온 모든 이들은 같은 친구들보다는 좀 더 높은 곳으로 위치하여 낮은 곳을 바라보는 계급화를 늘 기대하고 실천하려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 혹은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의 ‘치맛바람’ 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이 살짝 바뀌어서 ‘교육열’ 이라고 포장하기는 하나 개인의 삶을 통제와 포육으로 위장한 대리만족의 향연은 결코 ‘하늘아래 새로운 것’인 문화가 아니었다. 도덕적인가 혹은 세속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교육열을 ‘시장 속물들의 근성’으로 자칫 폄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는 행동이니 해서는 안 되겠다. 고래로부터 전해진 전통문화 아닌가.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인류라고 불리는 품종은 여타의 생명체보다 긴 (가장 길지는 않겠지만 거의 최상급에 속한다.) 포육기간을 통해 생물학적인 연약함을 학습을 통해 다른 종보다 우월하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시켜왔다. ‘여타의 종’을 여타의 인간들, 같은 교육과정을 겪는 경쟁자들 로 바꾸게 되면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은 단순하게 유전적으로 좋은 품종일 뿐 아니라 그 품종이 곱게 길러지기 위한 환경이 필요하다. 양반과 상놈의 계급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모두가 교육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수한 생각을 하는 것이니 그런 생각은 접어놓도록 하자. 태어나면서 수저의 재질을 결정 받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수저 재질을 의심할 시간에 금수저는 순도를 높이는 제련작업을 통해 순도와 경도를 높여가는 것이고, 그것은 자사고-특목고-서울대로 이어지는 제련과정을 지원하는 부모의 재원이 필수요소 아닌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모든 이가 평등한 사회’를 입으로 내뿜을 시간에 “왜 마르크스의 이론은 망했는가” “왜 집단농장은 노동 효율성이 떨어지는가” 하는 우파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동의하고 겉으로라도 수저 재질에 ‘금박’이라도 입히는 친화력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개인의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혹은 ‘모든 이가 적절하게 잘사는 공리주의의 삶’을 추종하지 않는다면 딱히 내 자식에게 고급교육을 시킴에 있어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미 고전 또는 고전에 준하는 비사들이 부모의 지원으로 자식의 계급이 결정된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맹모삼천지교부터 석봉이 어머님의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여러 번 확인된 바 있는 출세와 계급화의 출발을 의미한다. 조국번영을 위한 대의가 있으니 국가에서도 찬동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맹부삼천지교’가 문제되고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확전을 시킨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미 그 목적을 상실했을 만큼 남한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싸움으로 진화했다. 이 문제가 시민사회의 입안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을 때 즈음. ‘조국전쟁’의용도는 원래의 용도와 달라졌다. 그저 내 이름을 알려 신진 평론가가 되려는 잡것들의 칼춤이나, 이때다 싶어 충성의 혈서를 난무해대는 속칭 보수의 앞잡이들의 퍼포먼스의 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 싸움 안에 진보 대 보수는 없다. 물론 우리 모두 알다시피 한국 땅에 진보와 보수는 없다. 다들 참칭하면서 심심할 때 씹어대는 식자재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석봉이 어머님의 설화는 ‘당시 쌀로 만든 떡이 서민들에게 그렇게 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물건이였는가?’ 정도의 식문화 정통성에 대한 이의제기였다면 차라리 유쾌할 것 이다. 현실은 지루하고 비루하다. 이미 조국후보자의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논문 저자 자격의 여부’ . ‘장학금 지급과정의 투명성 여부’ . ‘아버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계급에 굴복한 입시 관계자들의 굴종적인 판단’ 등 뉴스를 만드는 이들도 다양해지고 한 가지 뉴스가 생산되고 미처 소진되기도 전에 새로운 교육 전반의 문제에 대한 논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조국이 쏘아올린 작은 공’ 정도의 사건으로 사초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청문회가 아닌 ,민족주의를 맹신하면서 살고 있으나 결코 같은 민족이 잘되는 것을 볼 수 없는 배앓이 병을 지닌(속담인용이다) 모순의 집단에서 벌어지는 블랙코메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론은 시시각각 일정하지 않고 중구난방이다. “나경원보다는 조국이다” “조국 정도 안하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 어차피 이 싸움에는 피아식별이 별도로 필요 없다. 애초의 싸움의 목적이 ‘후보자의 올바른 업무수행능력과 공직자의 태도’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봤던 그 싸움판이 맞거나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시계 찾으러 논으로 가라고 추동하던 SBS 기자는 본인이 쓴 기사를 잊고 태평하게 살고 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조국’ 때문이다. 기자들이 말하는 ‘조국이 문제다’가 맞다. 조국이 국론 분열의 아이콘이며 부패와 반부패, 진보와 보수 , 유산론자와 무산론자의 계급적 갈등, 모두 맞는 말이다. “조국은 물러나십시오” “조국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이쯤이면 스포츠다. 스포츠 즐기는 자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자기 발밑에 응원하면서 쓰던 휴지 한 장 다시 주어서 가지 않는다. 저열하게도 말이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흘러가고 있다. 자연인 조국의 인권을 누가 고려하는가. 인권 감수성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어설프게 난민이나 홍콩문제 , 인도문제에 쓰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조국수호에 여념이 없는데 말이다. 남 걱정이나 하다니 말이다. ‘청년세대의 박탈감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고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말하는 이의 집안 사정을 같이 비교하자고 하면, 또는 “그쪽 당부터 전수조사”라고 하면 뒷짐 풀고 도망가는 일이 다반사다. 결국 “조국”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조국수호의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나보다. “국가 입시체계 전반에 대한 고민을 해보시라” 대통령령으로 지정된 내용은 아니니까 벌써부터 용비어천가를 부르지는 않아도 좋다. 문대통령만 느껴온 문제도 아니고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류의 역사가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영화 ‘나랏말싸미’에도 나오던 내용이고, 좀 더 올라가면 고려시대 호족들의 혼인관계도 있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씨족관계 설화 중 “꿈을 내게 팔라”던 공주의 이야기도 생각나는 것이 말이다. 다시 뉴스를 읽어보자 “이 모든게 조국 때문이다”. 지금쯤 다시 읽어보니 작금의 사단은 사실 ‘조국’ 때문은 아니다. 앞절 ‘조국’ 이라는 부분에 후보자 이름을 넣던지 국가를 넣던지 읽는 이들의 선택에 맡긴다. 어차피 끝에서 맴도는 답은 같지 않은가. 1964년 당시 어머니들은 실천적 행위를 통해 닫힌 교문에 강력한 의사표시를 했다.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와서 솥단지 채로 집어던지면서 말이다. “엿 먹어라!” 1990년대 마르크스 이론의 종말을 예언했던 베를린 장벽의 낙서와 비슷한 느낌의 퍼포먼스 아닌가. 물론 지금도 그 엿자욱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는 ‘역사지키기’의 사명감이 참 부족하다. (임정 100년 되면 역사전쟁 기사 창궐하고 , 올림픽 메달 따면 전 국민이 그 운동의 국가대표가 되고, 아침에 정력에 좋다고 하는 미나리 요리가 나오면 저녁에 미나리꽝이 말라버리는 신속함을 지닌 나라에서 말이다.) 계급화 타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돌 던질 수 있는 자, 교육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싸움에 대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조국에게 돌을 던져라’ 아니 엿을 던져라. 현직 대학입시 사교육 종사자 중 가장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강의자에게 작금의 상황을 물었다. “조국이 잘못한 겁니까?” “조국이 그 정도도 안하면 국가부도 , 아니 가정부도 같은 겁니다.”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머지 뉴스들도 마찬가지다. 파면 팔수록 “그동안 엉망으로 입시전쟁이 진행되어 왔구나.” 하는 자괴감만 가중되는 것이다. 법무부장관 후보자 검증을 하라고 앉혀놨더니 해결도 못하는 교육계급화 문제만 자꾸 들먹인다. 피아식별이 안 된다. 문제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당최 답이 안 나온다. 하루를 그저 진지하게 땀 흘리며 계급화를 인지 안하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자꾸 이솝우화 같은 뉴스를 던져주는 언론들도 밉고, 옆자리에서 연대와 고대의 서열싸움을 설파하는 저 본부장도 싫다. 다들 책임지는 사람 없이 말로만 떠든다. 1964년 무즙 엄마들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대신해서 이럴 때 뜨거운 김이 남아있는 엿을 던져주었으면 한다. “엿이나 먹어라” 라고.

[윤종훈의 히스토요리] “엿 먹어라”

윤종훈 작가 승인 2019.09.03 15:29 | 최종 수정 2139.05.06 00:00 의견 0

 

1964년 12월, 당시 중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치러진 시험문제 중 ‘자연’ 과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엿을 만들기 위해 넣는 것으로 적합한 것은?”

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러나 다른 보기 중 하나였던 ‘무즙’, 이 예시가 문제였다. 무즙 안에 들어있던 ‘아밀라아제’. 아밀라아제를 상품화시킨 이름이 ‘디아스타아제’였던 것이다. 여러 종류의 아밀라아제를 총칭하는 이름이 바로 디아스타아제다. 즉 상위 개념이면서 상품화 된 (규격화 된) 정답이 있었다. 문제를 제출한 교육부는 큰 난관에 봉착했다. 출제의도와 다르게 중복된 답이 나왔으니 말이다. 출제위원회는 ‘1가지의 정답’만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즙을 선택한 지원자들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출제위원회는 문제를 없애버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모든 학생에게 1점의 가산점을 주기로 한다. 1차원적인 해결방식이다. 당연히 ‘디아스타아제’만 선택한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1점은 지금의 중학교 입시와는 다르게 등락을 결정짓는 ‘한 끗’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가는 것은 지금처럼 평준화되고 의무교육의 범주 하에서 자연스럽게 진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019년 현시점의 대학입시와 비슷한 지원제 형태였다.

무즙과 엿기름의 전쟁, 아니 정확하게는 ‘무즙을 선택한 수험생의 어머니’와 ‘엿기름을 선택한 어머니’ 의 전쟁, 그리고 전쟁을 촉발한 교육당국의 면피성 행동이 어우러진 총칼 없는 전쟁 이였다. 당시 명문 중학교의 입시는 명문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계급화의 시작을 의미했다.

2019년 지금의 ‘서울대-연고대-서성한’으로 축약되어 불리는 속칭 상위권 대학교들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70년대 시절을 보낸 지금의 사회지도층 혹은 기득권들의 끈끈한 카르텔로 불리는 경기고-서울고 등등의 고등학교 출신. 명문대 그리고 예전에는 명문고라고 불리었던 두 집단의 명찰값은 여타의 학교들과는 다르게 느껴지고 작동했다. 기시감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대학교가 고등학교로 대변 치환 된 것 일뿐, 예나 지금이나 같은 땅에서 살아온 모든 이들은 같은 친구들보다는 좀 더 높은 곳으로 위치하여 낮은 곳을 바라보는 계급화를 늘 기대하고 실천하려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 혹은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의 ‘치맛바람’ 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이 살짝 바뀌어서 ‘교육열’ 이라고 포장하기는 하나 개인의 삶을 통제와 포육으로 위장한 대리만족의 향연은 결코 ‘하늘아래 새로운 것’인 문화가 아니었다. 도덕적인가 혹은 세속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교육열을 ‘시장 속물들의 근성’으로 자칫 폄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는 행동이니 해서는 안 되겠다. 고래로부터 전해진 전통문화 아닌가.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인류라고 불리는 품종은 여타의 생명체보다 긴 (가장 길지는 않겠지만 거의 최상급에 속한다.) 포육기간을 통해 생물학적인 연약함을 학습을 통해 다른 종보다 우월하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시켜왔다. ‘여타의 종’을 여타의 인간들, 같은 교육과정을 겪는 경쟁자들 로 바꾸게 되면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은 단순하게 유전적으로 좋은 품종일 뿐 아니라 그 품종이 곱게 길러지기 위한 환경이 필요하다. 양반과 상놈의 계급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자유 대한민국에서는 모두가 교육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수한 생각을 하는 것이니 그런 생각은 접어놓도록 하자. 태어나면서 수저의 재질을 결정 받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수저 재질을 의심할 시간에 금수저는 순도를 높이는 제련작업을 통해 순도와 경도를 높여가는 것이고, 그것은 자사고-특목고-서울대로 이어지는 제련과정을 지원하는 부모의 재원이 필수요소 아닌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모든 이가 평등한 사회’를 입으로 내뿜을 시간에 “왜 마르크스의 이론은 망했는가” “왜 집단농장은 노동 효율성이 떨어지는가” 하는 우파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동의하고 겉으로라도 수저 재질에 ‘금박’이라도 입히는 친화력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개인의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혹은 ‘모든 이가 적절하게 잘사는 공리주의의 삶’을 추종하지 않는다면 딱히 내 자식에게 고급교육을 시킴에 있어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미 고전 또는 고전에 준하는 비사들이 부모의 지원으로 자식의 계급이 결정된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맹모삼천지교부터 석봉이 어머님의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여러 번 확인된 바 있는 출세와 계급화의 출발을 의미한다. 조국번영을 위한 대의가 있으니 국가에서도 찬동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맹부삼천지교’가 문제되고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확전을 시킨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미 그 목적을 상실했을 만큼 남한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싸움으로 진화했다. 이 문제가 시민사회의 입안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을 때 즈음. ‘조국전쟁’의용도는 원래의 용도와 달라졌다. 그저 내 이름을 알려 신진 평론가가 되려는 잡것들의 칼춤이나, 이때다 싶어 충성의 혈서를 난무해대는 속칭 보수의 앞잡이들의 퍼포먼스의 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 싸움 안에 진보 대 보수는 없다. 물론 우리 모두 알다시피 한국 땅에 진보와 보수는 없다. 다들 참칭하면서 심심할 때 씹어대는 식자재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석봉이 어머님의 설화는 ‘당시 쌀로 만든 떡이 서민들에게 그렇게 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물건이였는가?’ 정도의 식문화 정통성에 대한 이의제기였다면 차라리 유쾌할 것 이다. 현실은 지루하고 비루하다. 이미 조국후보자의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논문 저자 자격의 여부’ . ‘장학금 지급과정의 투명성 여부’ . ‘아버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계급에 굴복한 입시 관계자들의 굴종적인 판단’ 등 뉴스를 만드는 이들도 다양해지고 한 가지 뉴스가 생산되고 미처 소진되기도 전에 새로운 교육 전반의 문제에 대한 논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조국이 쏘아올린 작은 공’ 정도의 사건으로 사초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청문회가 아닌 ,민족주의를 맹신하면서 살고 있으나 결코 같은 민족이 잘되는 것을 볼 수 없는 배앓이 병을 지닌(속담인용이다) 모순의 집단에서 벌어지는 블랙코메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론은 시시각각 일정하지 않고 중구난방이다. “나경원보다는 조국이다” “조국 정도 안하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 어차피 이 싸움에는 피아식별이 별도로 필요 없다. 애초의 싸움의 목적이 ‘후보자의 올바른 업무수행능력과 공직자의 태도’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봤던 그 싸움판이 맞거나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시계 찾으러 논으로 가라고 추동하던 SBS 기자는 본인이 쓴 기사를 잊고 태평하게 살고 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조국’ 때문이다. 기자들이 말하는 ‘조국이 문제다’가 맞다. 조국이 국론 분열의 아이콘이며 부패와 반부패, 진보와 보수 , 유산론자와 무산론자의 계급적 갈등, 모두 맞는 말이다. “조국은 물러나십시오” “조국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이쯤이면 스포츠다. 스포츠 즐기는 자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자기 발밑에 응원하면서 쓰던 휴지 한 장 다시 주어서 가지 않는다. 저열하게도 말이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흘러가고 있다. 자연인 조국의 인권을 누가 고려하는가. 인권 감수성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어설프게 난민이나 홍콩문제 , 인도문제에 쓰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조국수호에 여념이 없는데 말이다. 남 걱정이나 하다니 말이다. ‘청년세대의 박탈감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고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말하는 이의 집안 사정을 같이 비교하자고 하면, 또는 “그쪽 당부터 전수조사”라고 하면 뒷짐 풀고 도망가는 일이 다반사다.

결국 “조국”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조국수호의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나보다. “국가 입시체계 전반에 대한 고민을 해보시라” 대통령령으로 지정된 내용은 아니니까 벌써부터 용비어천가를 부르지는 않아도 좋다. 문대통령만 느껴온 문제도 아니고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류의 역사가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영화 ‘나랏말싸미’에도 나오던 내용이고, 좀 더 올라가면 고려시대 호족들의 혼인관계도 있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씨족관계 설화 중 “꿈을 내게 팔라”던 공주의 이야기도 생각나는 것이 말이다.

다시 뉴스를 읽어보자 “이 모든게 조국 때문이다”. 지금쯤 다시 읽어보니 작금의 사단은 사실 ‘조국’ 때문은 아니다. 앞절 ‘조국’ 이라는 부분에 후보자 이름을 넣던지 국가를 넣던지 읽는 이들의 선택에 맡긴다. 어차피 끝에서 맴도는 답은 같지 않은가. 1964년 당시 어머니들은 실천적 행위를 통해 닫힌 교문에 강력한 의사표시를 했다.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와서 솥단지 채로 집어던지면서 말이다. “엿 먹어라!”

1990년대 마르크스 이론의 종말을 예언했던 베를린 장벽의 낙서와 비슷한 느낌의 퍼포먼스 아닌가. 물론 지금도 그 엿자욱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는 ‘역사지키기’의 사명감이 참 부족하다. (임정 100년 되면 역사전쟁 기사 창궐하고 , 올림픽 메달 따면 전 국민이 그 운동의 국가대표가 되고, 아침에 정력에 좋다고 하는 미나리 요리가 나오면 저녁에 미나리꽝이 말라버리는 신속함을 지닌 나라에서 말이다.)

계급화 타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돌 던질 수 있는 자, 교육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싸움에 대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조국에게 돌을 던져라’ 아니 엿을 던져라. 현직 대학입시 사교육 종사자 중 가장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강의자에게 작금의 상황을 물었다. “조국이 잘못한 겁니까?” “조국이 그 정도도 안하면 국가부도 , 아니 가정부도 같은 겁니다.”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머지 뉴스들도 마찬가지다. 파면 팔수록 “그동안 엉망으로 입시전쟁이 진행되어 왔구나.” 하는 자괴감만 가중되는 것이다. 법무부장관 후보자 검증을 하라고 앉혀놨더니 해결도 못하는 교육계급화 문제만 자꾸 들먹인다.

피아식별이 안 된다. 문제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당최 답이 안 나온다. 하루를 그저 진지하게 땀 흘리며 계급화를 인지 안하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자꾸 이솝우화 같은 뉴스를 던져주는 언론들도 밉고, 옆자리에서 연대와 고대의 서열싸움을 설파하는 저 본부장도 싫다. 다들 책임지는 사람 없이 말로만 떠든다. 1964년 무즙 엄마들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대신해서 이럴 때 뜨거운 김이 남아있는 엿을 던져주었으면 한다. “엿이나 먹어라” 라고.

 

 

저작권자 ⓒ뷰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