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 북경대와 교류 차원에서 2박3일 중국 방문 일정이 잡혔다. 지금처럼 여권과 비자만 가지고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군미필 남성은 제출할 서류가 제법 있었다. ‘국외여행 허가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는 병무청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또 귀국보증서를 내기 위해 보증인 2명을 세워야 하는데, 이들의 재산세납부영수증을 지참해야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서류들을 제출한 뒤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중국 방문은 무산됐다. 이후 나의 첫 해외 나들이는 한참이 지난 후 회사 출장을 통해서였다.  현재 나이가 40대를 넘은 이들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일 것이다. 그 윗세대는 해외 나들이는 꿈이나 다름없었다. 북한 때문에 대륙으로 연결이 끊긴 상황에서 해외여행은 공항을 통해서(간혹 배도 있다) 주로 이뤄진다. 그러나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 여권으로 188개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지금이지만, 1983년 이전만 해도 해외는 공무나 출장이 아니면 나가기 힘들었다. 순수 여행 목적의 여권은 아예 발급되지 않던 시대였다.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는 1989년에 이뤄졌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해외여행은 쉽지 않았다. 당시 여권 신청자는 한국관광공사 산하 관광교육원, 자유총연맹, 예지원 등에서 하루 동안 반공 소양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교육을 받았다는 필증이 없으면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이 교육은 1992년 폐지됐다. (앞서 언급한 군미필자 귀국보증인제도 등은 2005년 폐지됐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던 이유가 절차의 까다로움도 있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200만원의 예치금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항공권이 비쌌다. 1990년 11월 기준 서울-제주 항공권 가격은 3만 3000원대였고, 1991년에는 4만원대로 올랐다. (참고로 당시 물가는 시내버스 140원, 택시 800원, 자장면 600원, 영화 2600원, 휘발유 400원이다) 때문에 해외여행은 ‘부의 상징’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절차나 비용면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환경이다. 저가항공과 인터넷을 통한 온갖 정보의 공유, 그리고 한국 경제력이 높아진 것에 기인한다. 당장 비수기의 경우 동남아 비행기 티켓은 왕복 30만원 전후이고, 온갖 특가와 타임제 세일을 이용하면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 등도 과거와 달리 낮은 비용을 지불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40대를 기준으로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경험했던, 혹은 현재 경험하는 해외여행의 차이가 다르고, 이 때문에 간혹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윗세대는 온갖 정보로 가성비 높게 해외에서의 경험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를 향해 “경제가 어렵다는데 해외에 잘도 나간다”라며 비판하고,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경험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한 채 “등산복 입은 한국인 아저씨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이 창피하다”는 반응을 종종 보인다. 시대와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해방 후 독재의 시대를 40년 넘게 거치고, 북한 때문에 생긴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륙의 섬’이 되어버린 역사 때문에 궁금해졌다. 20년이 지나면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된지 반세기가 되는데, 그때 한국인들에게 해외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변해 있을까. 자동차든 기차든 북한을 지나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될까. 아니면 여전히 비행기에 주로 의존해 해외에 나설까. 지금 태어나는 아기들과 10대들에게 해외여행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하나는 확실하다. 백발이 성성한 한국인 노부부가 배낭 하나 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될 것이다.

[여행 한담] 반공교육 받고 갔던 해외여행, 이젠 ‘지금 바로’

유명준 기자 승인 2019.10.23 17:07 | 최종 수정 2019.11.02 12:31 의견 0
 


1997년 가을, 북경대와 교류 차원에서 2박3일 중국 방문 일정이 잡혔다. 지금처럼 여권과 비자만 가지고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군미필 남성은 제출할 서류가 제법 있었다. ‘국외여행 허가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는 병무청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또 귀국보증서를 내기 위해 보증인 2명을 세워야 하는데, 이들의 재산세납부영수증을 지참해야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서류들을 제출한 뒤 여권과 비자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중국 방문은 무산됐다. 이후 나의 첫 해외 나들이는 한참이 지난 후 회사 출장을 통해서였다. 

현재 나이가 40대를 넘은 이들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일 것이다. 그 윗세대는 해외 나들이는 꿈이나 다름없었다. 북한 때문에 대륙으로 연결이 끊긴 상황에서 해외여행은 공항을 통해서(간혹 배도 있다) 주로 이뤄진다. 그러나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 여권으로 188개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지금이지만, 1983년 이전만 해도 해외는 공무나 출장이 아니면 나가기 힘들었다. 순수 여행 목적의 여권은 아예 발급되지 않던 시대였다.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는 1989년에 이뤄졌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해외여행은 쉽지 않았다. 당시 여권 신청자는 한국관광공사 산하 관광교육원, 자유총연맹, 예지원 등에서 하루 동안 반공 소양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교육을 받았다는 필증이 없으면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이 교육은 1992년 폐지됐다. (앞서 언급한 군미필자 귀국보증인제도 등은 2005년 폐지됐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던 이유가 절차의 까다로움도 있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200만원의 예치금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항공권이 비쌌다. 1990년 11월 기준 서울-제주 항공권 가격은 3만 3000원대였고, 1991년에는 4만원대로 올랐다. (참고로 당시 물가는 시내버스 140원, 택시 800원, 자장면 600원, 영화 2600원, 휘발유 400원이다) 때문에 해외여행은 ‘부의 상징’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절차나 비용면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환경이다. 저가항공과 인터넷을 통한 온갖 정보의 공유, 그리고 한국 경제력이 높아진 것에 기인한다. 당장 비수기의 경우 동남아 비행기 티켓은 왕복 30만원 전후이고, 온갖 특가와 타임제 세일을 이용하면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 등도 과거와 달리 낮은 비용을 지불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40대를 기준으로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경험했던, 혹은 현재 경험하는 해외여행의 차이가 다르고, 이 때문에 간혹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윗세대는 온갖 정보로 가성비 높게 해외에서의 경험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를 향해 “경제가 어렵다는데 해외에 잘도 나간다”라며 비판하고,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경험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한 채 “등산복 입은 한국인 아저씨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이 창피하다”는 반응을 종종 보인다. 시대와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해방 후 독재의 시대를 40년 넘게 거치고, 북한 때문에 생긴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륙의 섬’이 되어버린 역사 때문에 궁금해졌다.

20년이 지나면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된지 반세기가 되는데, 그때 한국인들에게 해외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변해 있을까. 자동차든 기차든 북한을 지나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될까. 아니면 여전히 비행기에 주로 의존해 해외에 나설까. 지금 태어나는 아기들과 10대들에게 해외여행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하나는 확실하다. 백발이 성성한 한국인 노부부가 배낭 하나 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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