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9일 서울 서초구 한강홍수통제소에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환경부)
한국의 배출권거래제는 시장 메커니즘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한다는 취지로 2015년 도입됐다. 하지만 제3차 계획기간(2021~2025) 동안 유상할당 비중은 고작 4% 수준에 머물러 ‘공짜 탄소’가 제도의 기본값처럼 굳어졌다. 이로 인해 최대 1억4000만 톤의 잉여 배출권이 발생했고 가격은 톤당 8000원대에 갇혀 실질적인 감축 투자 유인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 EU·미국 “돈 내야 줄인다”…냉정한 룰
해외 주요국은 이미 유상할당을 확대하며 배출권거래제의 실효성을 강화해왔다. 유럽연합(EU)은 발전 부문 배출권을 100% 유상 경매로 판매한다. 배출권을 구매하지 않으면 생산 확대가 불가능해 기업은 효율 개선과 재생에너지 투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2005년 이후 ETS 대상 산업 배출량은 절반 가까이 줄었고, 최근에도 1년 새 5% 추가 감축을 달성했다. 경매 수익은 기후기금으로 환류돼 산업 충격 완화와 신산업 육성에 활용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상당 비율을 유상 경매로 배분하고, 수익을 재생에너지 투자와 취약계층 지원에 사용한다. 일본도 2023년부터 도쿄·사이타마를 중심으로 ‘부분 유상+강제 감축’ 제도를 가동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배출권을 돈 주고 사야 줄인다”는 원칙이 정착하는 흐름이다.
■ 산업계 “전기요금 폭등” 반발 vs 감축 유인 강화
유상할당 확대가 전기요금을 얼마나 자극할지는 논쟁의 핵심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발전 부문 유상 비율을 50%로 올리면 제조업 전기요금이 연간 5조원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력 다소비 업종은 국제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가정용 전기요금 상승폭이 월 2~3000원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플랜1.5와 연세대 김용건 교수의 공동 연구는 유상할당 비중 확대가 한국 경제에 어떤 파급효과를 주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결과는 단순한 ‘비용 증가’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력·도시가스 업종은 배출권 비용 부담으로 가장 큰 생산 감소가 나타났다. 전력요금 상승으로 전력 수요가 줄고 발전 부문 배출량이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광업 역시 에너지 가격 상승에 민감해 타격이 불가피한 것으로 분석됐다. 반대로 운송·자동차·서비스 산업은 오히려 생산 증가 효과가 관찰됐다. 특히 전기차 산업은 배출권 경매 수익이 녹색산업 보조금으로 환류될 경우 성장 폭이 크게 확대됐다. 제조업 전반은 업종이 다양해 평균적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철강·석유화학은 단기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 (사진=연합뉴스)
■ 움직이기 시작한 정부·국회…과제는 ‘정의로운’ 전환
해당 연구는 유상 확대가 전기요금 상승을 초래하지만, 동시에 국내총생산(GDP) 최대 0.37% 증가와 고용·소비 확대라는 긍정 효과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배출권 유상할당 수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산업별 명암이 갈린다는 것이다.
새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강화를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유상할당 확대 기족 뚜렷하다. 4차 기본계획(2026~2030년)에서는 발전사 등 대규모 배출업종을 중심으로 유상 비중을 단계적으로 50%까지 늘리는 방안이 논의된다. 환경부는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배출권거래제 개선 법안을 의결, 시장 참여자를 금융사·기관투자자까지 확대하고 정부 개입 요건을 완화해 가격 안정 장치를 보강했다.
국회도 움직이고 있다. 환경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무상할당 축소 법안이 발의됐으며, 일부 의원들은 “무상 배출권은 사실상 기업 보조금”이라며 제도 개편을 촉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번에 50%까지 확대하기보다 단계적 확대와 보완책 병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전기요금 보조, 기후대응기금의 산업·고용 지원, 에너지 빈곤층 보호 정책이 병행되지 않으면 제도의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K-ETS는 지난 10년 동안 ‘무상할당과 잉여 배출권 현금화’라는 구조적 모순을 반복해왔다. 배출권거래제가 본래 목적을 되찾기 위해서 제도의 개편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 전환을 얼마나 ‘정의롭고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