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공공기관은 한 해의 성과를 정리하고, 다음 해의 기본계획을 수립하느라 분주하다. 예산이 모두 집행되었는지, 연초에 세운 핵심성과지표(KPI)를 달성했는지, 각 세부 사업별 우수사례는 무엇인지 하나씩 모아본다. 올해 드러난 문제점과 미흡한 지점은 무엇이었는지 짚어 보고, 그 개선점을 내년도 계획 속에 어떻게 녹여낼지 성과발표회나 워크숍, 취합된 자료 분석 등을 통해 정리해 나간다.
필자 역시 그런 업무로 11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직장에서 마련해준 은퇴 설계 강좌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내 개인적 삶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니 매해 마지막 날이나 새해 첫날이면 마음을 다잡고 새 다이어리에 새해 계획을 정성스레 적어 넣곤 했다. 하지만 정작 지난 한 해의 생활 전반을 꼼꼼히 되돌아보며, 지출·자산·보험 등 재정 현황부터 물리적 삶의 공간과 인간관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비워야 새롭게 채울 수 있는데, 나는 다짐만 무질서하게 늘어 놓았던 셈이다.
마침 연말이고, 새해를 한 달 앞두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내 삶 속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정비할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공간, 다음은 재무, 이어서 관계와 일, 마지막으로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정체성 회복까지…. 계획을 세우다 보니 12월 한 달이 부족할 정도다.
정리의 고수들은 어떻게 할까
필자처럼 멀티태스킹을 선호하고 늘 새로운 자극을 좇는 사람들은 대체로 ‘정리’에 약하다. 확산적 사고에는 익숙한데, 수렴하는 활동은 왠지 비생산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쓰고, 벌리고, 쌓아두는 데는 능숙해도 분류하고, 버리고, 잘 활용한 경험은 많지 않아 막상 실행하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국내외 정리의 달인들은 ‘정리법 공유’에도 달인이라는 점이다. 참고할 책과 자료가 정말 많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원칙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정리의 시작은 ‘버리기’
물건을 고르는 기준은 ‘설렘’
공간이 아닌 카테고리 기준(의류→책→식품→소품 등)
하루 혹은 한 주에 한 가지씩, 일생에 단 한 번 ‘축제처럼’ 해보기
관심이 생기니 그동안 지나쳤던 유용한 팁도 눈에 들어왔다. 연말은 기부의 계절이다. 강의료나 심사비 일부를 기부하는 것도 좋지만, 에너지와 자원을 들여 만들고는 집 안 어딘가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해 기부처에 보내는 행위는 여러모로 더 뿌듯한 일이다. 일정량(박스 3개 정도) 이상이면 ‘아름다운가게’, ‘굿윌스토어’ 같은 곳에서 방문 수거와 함께 기부금 공제도 해준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마음이 가는 곳에 길이 있다.
다음은 재무 정비
요즘은 지출 대부분이 카드로 이루어져 소비 패턴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건 욕망의 무덤 속을 헤집으며 내가 남긴 온갖 소비의 흔적들을 확인하는 마음의 불편함.
하지만 그 불편을 이겨내고 냉정하게 들여다보니, 문제를 해결하는 나만의 방식과 소비의 패턴이 여실히 보였다. 어떤 품목은 ‘과도한 걱정’이 개입된 탓에 불필요하게 과다했고, 어떤 소비는 신문 기사나 SNS와 잘 연계된 상품 광고에 순식간에 흔들려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결국, 당장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혹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다시 판단하는 것이 옳다.
생활 영역별 지출 가이드라인을 미리 잡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컨대 어느 은퇴 전문가가 권하는 “은퇴 후 보험료는 가급적 25만 원 내로 관리하라”는 조언을 참고하면, 과도하게 가입돼 있는 나의 보험은 연초에 우선순위 기준으로 특약과 옵션을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황을 점검하니 자연스레 새해 계획의 골격들이 잡히기 시작한다.
책과 기록은 곧 나의 정체성
책 정리는 공부에 대한 열정과 지식 활용의 실행력을 점검할 수 있는 아주 즐거운 작업이다. 왜 이것을 자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제별로 책들을 재배열하다 보면, 평생학습 차원에서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도 보이고, 특별히 좋았는데 기록이 부족했던 책은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의 슬라이드 같은 자료에 한두 장 추가해 축적하자는 보완의 의욕도 되살아난다.
나아가 은퇴 후 글을 쓰며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책 메모를 디지털로 정리하는 것’과 함께 ‘다이어리 정리’를 곁들이면 더 좋다. 특히 ‘일기는 손글씨’로 정서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해마다 다이어리를 폐기하기 전 지난 날들의 기억을 되짚으며 좀 더 오래 기억하고 싶거나 다시 활용하고 싶은 내용을 디지털 자산으로 축적하는 것도 좋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자서전의 한 챕터를 구성해 가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블로그나 노션(Notion)과 같은 정리 앱을 활용하는 이들이라도 시간이 흐른 기록을 다시 모으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통찰을 얻을 것이다.
책과 기록은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정체성의 지도이다. 이 정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인생 2막 혹은 3막을 위해 ‘정체성 찾기 여행’을 계획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관계는 가장 소중한, 그러나 깊이의 층위가 있는 자산
인간(의 뇌)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일명 ‘던바의 수’로 알려진 이 규모는 일반적으로 평균 지인 150명이다. ‘리멤버’와 같은 편리한 명함관리 앱을 활용하고 SNS상의 수많은 친구와도 다양한 관계들을 이어간다는 사람들에게 이는 지난 시대의 규모일 뿐, 한계는 확장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좁고 깊은 사귐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휴대폰 연락처 목록조차 그 규모가 안된다며 부담스러운 규모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의 은퇴 이후 변화를 목도했던 필자로서는 노후에 던바 수의 10분의 1이라도 평생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이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상호 가치를 유용하게 발전시키는 관계와 이해타산은 제쳐두고라도 마음을 우선하는 관계를 구분해 때때로 사소하지만 정성을 쏟아 붓고 신뢰를 더해가는 노력을 생각보다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기억에 약한 필자는 어느 때부터인가 명함을 받으면 명함에 어느 행사에서 만났는지와 그 사람의 특징을 적어 두고, 명함을 정리할 때 한 번씩 기억을 되살린다. 그러나 가끔 외부인을 초청해 논의하는 회의를 만들 때 이를 활용한 적은 있으나 그뿐이다. 전자의 사회적 관계가 후자의 오랜 관계로 넘어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중년 이후 지속 가능하고 깊이 있는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은 오래오래 연락할 관계들을 한 번씩 되새기고, 명절의 단체 문자가 아닌, 가끔 평범하지만 진솔한 안부(그냥 생각나 연락했다 해도 좋다)를 계절의 마디 마디에 한 번씩 물어봄은 어떤가.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누군가에게 연락할 때 전화기를 몇 번은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나와 같은 I(내향) 성향의 사람들은 더더욱 연말에 해보면 좋지 않겠는가.
엘리자베스타운의 치유 여행처럼
영화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에서 주인공 드류(Drew)는 사업 실패, 직장에서의 해고, 연인의 결별까지 겪고 자살을 결심하는 불운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찾아온다. 장례식을 위해 비행기에 오른 드류는 따뜻하고 다정한 승무원 클레어(Claire)를 만난다. 이후 둘은 통화를 이어가며 마음을 나누고, 클레어는 드류에게 ‘혼자 떠나는 치유 여행 코스’를 정성스럽게 설계해 준다.
“여기에서는 잠깐 내려 풍경을 보기”,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기”,
“이 구간에서는 이 노래를 듣기”,
“실패했던 일을 생각하는 대신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
…….
지도, 사진, 음악 플레이리스트로 채운 스크랩북은 드류가 자신의 인생을 되짚고 다시 삶과 사랑의 의지를 되찾게 하는 안내서가 된다. 연말·연초에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난다.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여행도 좋지만, 나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장소들, 앞으로의 이정표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기록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나와 같은 중년의 여성이라면, 십 년 뒤 혹은 이십 년 뒤, 자식에게 물려줄 기록을 만들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12월은 1년 중 가장 빨리 지나간다. 그러나 이 빠른 시간을 ‘매일 하나씩 비우고, 하나씩 깨닫는 지혜의 여정’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번 연말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충만한 시간이 될 것이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