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잠행 모드'가 장기화하는 모양새다. 이 부회장은 지난 8월 13일 가석방 출소 후 단 한 차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부회장 출소 뒤 삼성전자는 반도체, 바이오 등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현재까지 구체적인 '안갯속'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이를 두고 시민단체들의 취업제한 위반 고발,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부당합병 관련 재판 출석 등에 따른 '사법리스크'로 외부여건이 받쳐주지 못해 선뜻 경영 복귀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가석방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로 인한 경제활성화 및 백신 개발 등에 대한 기대를 안고 출소한 만큼 장기간 잠행은 비판의 화살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를 의식한 듯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삼성준법감시위원회 등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구체화되면 연말 정기인사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조기 인사로 경영일선에 복귀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6일 삼성전자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출소 후 32일 만인 지난달 14일 '청년 일자리'를 주제로 김부겸 국무총리와 회동하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뒤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삼성전자 서초 사옥과 수원 본사를 번갈아 방문하며 경영 전반을 챙기고 있지만 삼성물산 부당 합병 관련 재판에 출석 때를 제외하고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설과 추석 명절에 해외 출장을 갔던 행보도 올 추석에는 국내 잔류를 택했다.
당초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출소 후 건강을 추스른 뒤 적극적인 현장 경영에 나설 것으로 예측해왔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가석방 후 240조원 규모의 대대적인 투자·고용 계획을 발표하고 청년채용 행사에 참석할 때만 해도 이런 예상은 들어맞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집행유예 출소 후 45일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경영 복귀 신중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부회장이 가석방 신분인 만큼 5년간 취업제한 적용 위반 논란을 피하고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한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삼성의 투자에 대해 온갖 불확실한 소문만 난무해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불거진 삼성전자가 170억달러(약 20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증설 입지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미국 현지에서는 기존 공장이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시 외에 뉴욕주, 애리조나주와 텍사스주 테일러시 등이 후보지로 거론됐다. 급기야 최근 텍사스주 윌리엄슨 카운티에 있는 테일러시가 결정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에 삼성전자는 지난 5일 "신규 반도체 공장 투자와 관련해 다양한 방안을 지속 검토 중"이라며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공시했다. 이어 "추후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는 시점 또는 3개월 이내에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바이오 분야 역시 뚜렷한 결과물이 현재까지는 없는 상태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올해 3분기 모더나 백신 상업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지만 국내 생산분의 국내 우선 공급, 백신 핵심 기술 이전 등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국내에서 위탁 생산하는 일부 물량을 모더나 측에 국내용으로 돌리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모더나로부터 백신 원액을 받아 이를 작은 병에 담고 포장하는 역할만 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로부터 원액생산 기술까지 이전받는다면 한국의 자체 백신 수급이 가능해진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모더나측 관계자와 만난다면 백신 확보와 기술 이전이 가장 핵심적인 안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016년 하만 인수 후 멈춘 대규모 인수합병(M&A)도 여러 가지 설만 분분할 뿐 기사화된 것은 없는 상태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현 상태로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지배구조 및 조직개편안이 조만간 마련되면 인사 시기를 앞당긴 뒤 경영일선에 복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힘을 얻고 있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보고서 작성이 조만간 마무리될 전망이다. 삼성은 지난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핵심 관계사들이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 BCG에 용역을 맡긴 바 있다. 이 부회장이 지난해 5월 대국민 발표에서 자녀에게 경영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만큼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집단지배체제 등을 포함한 지배구조 개편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BCG는 글로벌 기업 사례를 검토해 삼성그룹에 걸맞은 최적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상법, 공정거래법 등 실정법 위반 가능성이 있는지도 점검한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예고한 점도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준법위는 최근 지배구조와 관련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이와 맞물려 대대적인 변화와 쇄신을 위해 조기 인사 단행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현재 삼성그룹은 계열사별 임원 인사를 위한 내부 평가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보통 11월 말~12월 초 사장단 인사를 발표한 후 후속 임원 인사를 단행한다. 이 부회장이 수감된 이후에도 임원 인사는 예정대로 진행됐지만 교체폭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 부회장이 출소했고 지배구조 개편 작업도 진행 중이어서 이번 임원 인사는 예년보다 시기가 빨라지고 교체폭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