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삼성전자 대표이사 한종희 부회장. (사진=삼성전자)
지난 7일 단행된 삼성전자의 2021년 정기 임원인사는 대대적 물갈이와 조직 슬림화로 규정지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언급했던 "냉혹한 현실"에 걸맞게 '엄혹한' 글로벌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이 예고한 사업구조개편 작업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전날 3명의 대표이사가 물러나는 등의 내용을 담은 2022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이에 DS(반도체)부문장인 김기남 부회장은 회장으로 승진, 종합기술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CE(소비자가전)부문 김현석 사장과 IM(모바일)부문 고동진 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삼성이 대표이사를 교체하는 것은 지난 2017년 10월 인사 이후 4년 만이다.
기대를 모았던 40대 최고경영자(CEO)는 나오지 않았지만 삼성 내부에서는 충격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대표이사 3인 체제'는 '2인 체제'로 바뀐다. CE와 IM을 통합한 세트부문은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해 맡는다. 이처럼 CE와 IM을 통합한 건 두 조직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전사 차원의 시너지를 창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DS부문장은 경계현 삼성전기 사장이 맡게 됐다.
당초 재계는 코로나19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삼성전자가 '대표이사 3인 체제'를 포함해 사장단 대부분을 유임하는 등 '안정'에 초점을 맞춘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파격적인 수준의 변화가 나타나자 '뉴 삼성' 구축에 속도를 내기 위한 이 부회장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아직 그룹 인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어서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긴 하지만 삼성 인사 특징인 신상필벌을 감안할 때도 실적에 비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그룹의 경우 부문장보다는 사업부장이 더 실권이 많아 이미 사업부장 직책을 땠을 때 현업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표이사의 직책은 가볍지 않은 자리다.
최근 이 부회장은 미국 출장 도중 "미래 세상과 산업의 지도가 새롭게 그려지면서 우리의 생존 환경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의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이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며 극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이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투자도 투자지만 이번에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와 마음이 무겁다"고 위기론을 꺼내들었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냉혹한 현실'에 대한 언급 이후 아무래도 인사팀에서 원래 인사안을 좀 더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며 "위기 상황에서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초 '안정'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인사안에서 '변화 추구'로 방향이 바뀌면서 주요 경영진들에 대한 설득작업 등이 진행되면서 인사가 이번 주로 미뤄졌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신임 삼성전자 대표이사 경계현 사장. (사진=삼성전자)
삼성그룹의 인사 파격 기조는 후속 임원 인사와 비전자·금융 계열사 인사에서도 어이질 공산이 크다. 이 부회장이 전자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통해 '뉴 삼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만큼 그룹 전반에 큰 폭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전자계열사를 중심으로 지난달 발표한 인사제도 개편안과 맞물려 나이와 직급을 뛰어넘은 인재 발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기존 부사장과 전무 직급을 모두 부사장으로 통합하고 임직원 승진 때 직급별 체류기간을 사실상 폐지하는 내용의 개편안을 발표했다. '젊은 피' 수혈과 과감한 외부인사 영입도 점쳐진다.
삼성 안팎에서는 정기 임원인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사업구조개편에 속도를 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속 제기되고 있다. 조직 슬림화를 통해 기업 전반의 군살을 빼고 신사업에 매진한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삼성은 지난 8일 르노삼성자동차 지분 19.9%를 전량 매각하겠다고 공시하면서 26년 만에 완성차 사업에서 완전한 철수를 선언했다. 삼성SDS가 홈네트워크사업 부문을 직방에 매각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면서 삼성그룹은 '선택과 집중'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기는 비주력 사업 정리의 일환으로 와이파이 모듈사업 매각을 재추진하고 있다.
삼성은 이 부회장에 경영 전면에 나선 2014년에도 비주력 계열사들을 통합 재편하는 사업구조개편 작업을 강도 높게 추진한 바 있다. 2014년 삼성그룹의 석유화학과 방위산업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넘기는 '빅딜'을 진행해 그해 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삼성종합화학·삼성토탈을 팔았다. 2015년 10월에는 삼성정밀화학·삼성BP화학·삼성SDI 화학부문도 한화에 넘겼다. 지난 2016년에는 프린터사업부를 미국 HP에 10억5000만달러(약 1조1160억원)에 매각했다. 프린팅사업이 점차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고 있고 프리미엄 시장점유율 확대도 쉽지 않은 B2B(기업간 거래) 영역이어서 매각을 결정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기본적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다'라는 경영철학을 지니고 있다"며 "이번 인사를 통해 그동안 불려진 몸집을 빼 향후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나서는 등 과감한 사업구조개편이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