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단행된 재계의 정기 임원인사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성과와 실적을 기반으로 한 신상필벌 원칙은 통용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헌신해온 인사들을 예우하는 연공서열도 희미해졌다. 새로운 리더십은 글로벌 파고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대교체와 조직쇄신, 미래 먹거리 창출에 초점을 맞췄다. 뷰어스는 재계가 올해 인사를 통해 말하는 것을 분석해봤다. -편집자 주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왼쪽부터), 지동섭 SK온 대표이사 사장, 최윤호 삼성SDI 대표. (사진=각 사)
올해 각 그룹의 임원 인사는 주력 사업과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핵심 측근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전장, 수소산업 등 각 그룹이 집중 투자하고 있는 분야에 '믿을맨'을 앞세웠다.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총수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2022년 임원 인사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국내 배터리 3사가 오너 일가를 포함한 총수들의 '복심'으로 불리는 인물들에게 중임을 맡겼다는 점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축을 벌여온 배터리 3사는 핵심 인사를 배터리 분야에 포진하며 힘을 실어줘 내년 경쟁은 더욱 격화할 전망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그룹 2인자'였던 권영수 대표에게 LG에너지솔루션의 '해결사' 역할을 맡겼다. 글로벌 이차전지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 새 대표이사로 취임한 권 대표는 2012년부터 2016년 LG유플러스 대표이사(부회장)로 옮기기 전까지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을 맡은 배터리 사업 전문가다.
권 대표는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 취임 2년만에 배터리 고객사를 10여개에서 20여개로 확대하고 회사를 중대형 배터리 시장 선도 업체로 키웠다. LG그룹 내에서는 배터리 사업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이 가장 높은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권 대표는 'GM 리콜사태'로 불거진 품질 이슈를 불식시키고 침체된 조직 분위기를 일신하며 내년 초 예정된 기업공개(IPO)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글로벌 1위로 우뚝 선다는 복안이다.
SK그룹은 지동섭 배터리사업 대표를SK온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지난해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로 부임한 지동섭 사장은 누적 수주잔량 기준 1TB가 넘어서는 등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의 질적, 양적 성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 사장은 지난 1990년 유공(現SK이노베이션)에 입사한 후 SK텔레콤 미래경영실장, 전략기획부문장 등을 역임한 그룹 내 대표적인 전략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 2016년 SK루브리컨츠 대표이사로 선임됐고, 지난해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로 옮겼다.
SK온 지동섭 대표이사 사장은 미국과 유럽 등 해외시장에서 생산능력 확대 및 수주량 확대에 더욱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지난 10월 출범한 SK온이 2022년 연간 영업이익이 조기에 흑자 달성하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SK온은 지난 17일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을 공동 대표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SK온은 최재원 수석부회장의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글로벌 사업영역 확장에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룹 내 '전략통'으로 오랜 기간 삼성전자에 몸담으며 신임이 두터운 최윤호 사장을 삼성SDI의 수장으로 낙점했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최 사장에게 삼성SDI를 맡긴 것은 경쟁사에 경쟁사에 뒤처진 배터리사업 육성에 대한 의지가 그만큼 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삼성SDI는 글로벌 사업 경험과 재무 전문가로 사업 운영 역량을 갖춘 최 사장이 합류하면서 자사 글로벌 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삼성SDI는 전영현 사장이 창사 이래 최초로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그룹 내 위상을 재확인했다.
반도체 부문은 '젊은피'를 앞세워 글로벌 수위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 인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삼성전자는 한종희 DX부문장을 필두로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박용인 삼성전자 DS부문 시스템LSI사업부장을 앞세웠다.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는 물론 수년 내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반도체) 1위를 노리고 있다.
올해 삼성그룹 사장 승진자 6명 중 가장 젊은 박 사장은 LG반도체(현 SK하이닉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아날로그 반도체 분야 글로벌 기업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동부하이텍(현 DB하이텍) 대표이사를 거쳐 삼성전자에 합류했다.
데이터 컨버터 분야 권위자로 특허도 28개 보유하고 있는 박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LSI개발실장, 센서사업팀장, 시스템LSI전략마케팅실장 등 내 주요 보직을 맡았다. 삼성전자측은 박 사장에게 비메모리 사업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스템반도체 사업 성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사업총괄 사장으로 40대인 노종원 부사장을 발탁했다. 노 사장은 글로벌 비즈니스와 함께 미래성장 전략과 실행을 주도하는 중책을 맡았다. 1975년생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2003년 SK텔레콤에 입사했다. 2016년 임원에 오른 지 5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최근 지지부진했던 인텔의 낸드 인수를 중국 당국이 승인하는 등 전조가 좋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제조·기술 담당 부사장이 2년만에 사장에 오른 것도 화제였다. SK하이닉스 전신인 현대전자 공정기술실에 입사한 뒤 연구개발(R&D) 분야와 생산현장을 두루 거쳤다. 연구원으로서 미세공정 개발을 맡아 많은 성과를 냈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조현장을 담당하며 ’포스트 이석희‘로 주목받았다.
정의선 헌대차그룹 회장은 미래사업 관련 임무를 부사장들에게 맡겼다. 미래성장기획실장 김흥수 부사장, 수소연료전지사업부장 임태원 부사장, 자율주행사업부장 장웅준 전무가 주인공이다. 모두 정 회장표 미래 신사업 분야에 배치된 만큼 향후 정 회장 친정체제를 견고히 할 인사로 부각됐다.
특히 2015년 입사해 2017년 2월 만 37세의 나이로 최연소 임원 타이틀을 얻은 장 전무는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개발실장·자율주행사업부장 등을 거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미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석·박사 출신으로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 등에 몸담은 후 자동차보안업체 피니인더스트리를 설립 직접 회사를 운영한 경험도 있다.
LG전자는 신임 최고경영자(CEO)에 조주완 CSO(최고전략책임자)를 선임해 전상사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구 회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전장사업은 LG전자의 신성장 사업이면서 유일한 적자 사업이다. 전장 사업의 성패에 미래 먹거리 창출이 달린 셈이다.
조 사장이 미국법인장에서 CSO로 옮길 때만 해도 LG전자의 기존 비즈니스는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룹 최고운영책임자(COO) 자리로 승진한 권봉석 부회장(당시 LG전자 CEO)을 보좌하며 스마트폰 사업 철수, 전장사업 강화 등 선택과 집중을 통한 ‘뉴 LG’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적잖은 역할을 담당했다. VS 스마트사업부장을 지낸 은석현 전무가 VS사업본부 신임 본부장으로 선임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은 본부장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분야에서 높은 성장세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