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J중공업 관계자들이 지난 3일 CI 선포식과 시무식을 열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HJ중공업)

삼성글로벌리서치(옛 삼성경제연구소)를 필두로 기업들이 잇따라 사명(社名)을 바꾸고 있다. 사명 변경에 따른 비용은 적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이 든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미래 비전과 철학을 담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바뀐 이름이 기업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내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하나같이 영어로 도배를 하고 있으며, 미래 비전을 담기 보다는 기존의 구태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지적도 나온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한진중공업은 최근 ‘HJ중공업’으로 사명을 교체했다. 이로써 1989년 한진그룹에 편입하면서부터 써온 한진중공업이란 이름은 32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앞서 동부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컨소시엄이 지난해 4월 산업은행 등으로 구성된 채권단으로부터 한진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사명 교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HJ중공업의 HJ는 ‘The Highest Journey’(위대한 여정)의 약자라는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분이 얼마나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HJ중공업은 한진중공업홀딩스와의 상표권 사용 기한이 끝나면서 재도약과 새로운 이미지 구축을 위해 사명 변경을 추진해왔다. 대주주 지분 감자, 채권단 관리를 거쳐 동부건설 컨소시엄이 인수 계약을 체결하는 우여곡절 끝에 사명 변경까지 이어진 것이다.

포스코SPS는 친환경 모빌리티 소재·부품을 생산·판매하는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출범 20개월만에 사명을 ‘포스코모빌리티솔루션’으로 교체했다. 앞서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20년 4월 스테리인리스강관(STS)사업, 트랜스포머모터코어(TMC)사업, 후판가공사업 등을 분할해 포스코SPS를 설립했다.

기존 사명인 SPS(Steel Processing & Service)는 철강가공센터로 인식돼 친환경 소재·부품 사업을 지향하는 미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제한적이라는 판단에 사명을 바꿔 달았다는 것이다. 이번 사명엔 차량·선박·자율주행차·드론 등 전동화 장치가 필요한 분야를 포함해 배터리·연료전지 등 새로운 소재와 부품 등에 기술적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설명이다.

솔라커넥트는 ‘엔라이튼’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기존 태양광 밸류체인 서비스에서 확장된 에너지 시장을 선도하는 에너지 IT 플랫폼 기업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엔라이튼은 기존 사명인 솔라커넥트가 태양광 서비스만 제공하는 회사로 인식돼 새 사명을 통해 전기차, 연료전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양한 에너지 자원을 아우르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겠다는 포부를 담아냈다.

기업들의 사명 변경은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떠오른 상황에서 미래 사업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사명 변경이 지나치게 현재 각광받고 있는 업종을 추종하고 기업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영어 잔치'를 벌이려는 듯 한글을 방치하는 현실에 곱지 않은 시선도 많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호박되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사명 변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페이스북은 회사 이름을 '메타'(Meta)로 바꾸고 메타버스 운영사로 변신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조롱에 가까운 반응이 온·오프라인에서 쏟아졌다. 혐오 발언, 허위 정보, 극단주의 사상을 유포한다는 비판에 맞닥뜨린 페이스북이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기보다 회사 이름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었다.

페이스북의 내부 문건을 유출하며 회사 경영 과정에서의 비윤리적 관행들을 폭로한 프랜시스 하우건 전 수석 프로덕트 매니저는 페이스북의 사명 변경을 비판하며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사명 변경은 기존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는 방식 중 하나"라며 "미래 비전과 철학을 담아내지 못하고 제품 품질을 우선하지 않은 채 기업 간판만 바꿔다는 것으로는 의미 있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