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작업자가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미국과 독일 등이 '반도체 주권' 확보를 위해 자국 반도체 기업의 인수합병(M&A)을 금지하는 것을 공언했다. 이에 반도체 부문 글로벌 수위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최대 실적 달성 여세를 몰아 올해 최대 투자를 구상하고 있지만 반도체 설비 등 공급망 차질을 비롯한 여러 난관을 돌파해야하는 상황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약 6조원 규모에 달하는 대만 반도체기업 글로벌웨이퍼스의 독일 반도체기업 실트로닉 인수를 결렬시켰다.

독일 경제부는 "투자 심사에 필요한 모든 검증이 기한 내에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반도체 칩 제조 분야에서 아시아 의존도가 심화하는 걸 의식해 자국 업체에 대한 M&A를 깐깐하게 심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독일은 자동차 업체들이 반도체 공급난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자국 웨이퍼 업체를 외국에 넘기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더욱이 대만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있다. M&A로 웨이퍼 경쟁력까지 강화되면 대만 반도체 생산 경쟁력이 더 높아질 수 있는데 독일로선 이 부분에도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미국은 2019년부터 중국 화웨이의 미국 반도체 칩 기술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왔다. 매그나칩반도체는 지난해 중국계 자본 와이즈로드캐피탈과 인수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으로 기술 유출을 우려해 반대하면서 불발됐다.

지난달에는 미국 하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20억달러를 지원하는 법안도 마련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강조해 온 반도체 산업 육성 지원뿐만 아니라 중국 등 비시장경제국이 미국에 제품을 수출할 경우 관세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지식재산권(IP) 업체 ARM 인수도 불발 가능성이 크다. 미국·영국·유럽연합(EU)·중국 등이 모두 불공정한 독점을 우려해 인수를 승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흐름이 국내 반도체 업체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지난해 최대 실적을 기록한 여세를 몰아 올해 대규모 투자로 K반도체의 글로벌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갈수록 단단해지는 세계 각국의 빗장에 녹록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SK하이닉스 이천 M16 공장 전경. (사진=SK하이닉스)

지난해 미국 인텔을 3년 만에 제치고 글로벌 1위 자리를를 탈환한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의 질주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시스템반도체 성장을 통한 ‘1위 수성’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계기로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 부문까지 2위 굳히기에 나설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올해 구체적인 투자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업계 안팎에선 공격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평택 반도체 3·4공장과 미국 테일러시 파운드리 공장 투자를 고려하면 지난해 투자 규모(70조6000억원)를 웃돌 것이란 관측이다.

SK하이닉스도 작년 수준(13조4000억원)을 뛰어넘는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경우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부지 매입, 미국 연구개발(R&D) 센터 건립 등 미래 성장을 위한 건설 및 인프라 부분의 투자가 늘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작년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공통으로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주문 후 납품까지 시간) 문제를 거론했다.

코로나19 이후 디지털 전환 가속화와 IT 제품 수요 급증으로 반도체 수요가 대폭 늘었고 미중 간 반도체 패권경쟁 속에서 반도체 기업들이 전례 없는 대규모 시설 투자를 집행하면서 반도체 장비 수요가 덩달아 증가한 점이 악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장비 제조사들의 생산 능력은 한정돼 있는데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의 시설 투자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신규 팹에 필요한 반도체 장비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전 세계적인 부품 공급망 차질도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 장기화에 영향을 줬다.

이 관계자는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대확산과 원자재·물류비용 상승, 글로벌 공급망 불안, 미국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 가속화와 긴축에 따른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우려 등 각종 불안요인이 상존하고 있다"며 "올해는 불확실성과의 전쟁이 될 것이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불확실성에 적절하게 대응해야 글로벌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