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건축물을 한국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표현하는 이여운 작가(사진=이여운)
이여운 작가는 200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오래된 건축물에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다. 건축물의 완성된 외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기본 구조인 뼈대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건축 도면이나 설계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건축물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머리 속에서 재 조합하여 작가만의 방식대로 그린다.
현실처럼 보이지만 현실이 아니고 여기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무너진다. 2차원적 소재로 재현된 3차원적 공간은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낸다.
갤러리 마리는 지난 15일부터 내달 9일까지 이여운 작가의 특별 초대전 ‘파사드 프로젝트 Façade Project’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건축물을 한국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표현한 작품 40여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이여운 작가를 지난 19일 갤러리 마리에서 만났다.
이여운 특별 초대전 ‘파사드 프로젝트 Façade Project’ 전시전경(사진=이동현기자)
▲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방과 후에 화실에 가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생들과 함께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게 일상이 되었다.
그러한 삶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어릴 때엔 집에서 한 시간 이상씩 걸리던 화실에 매일 다니던 것이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생의 가치를 다른 것이 아닌 예술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먹으로 건축물을 그리는 이유는?
= 나에게 건축물이란 인간의 삶의 형태와 인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다. 내가 건축물에서 집중하는 것은 인간이 남긴 흔적들이다.
건축물은 인간이 삶에서 고민하고 시험하고 변화한 것들이 건축 양식으로 남아 유한한 것들이 살면서 남기고 간 시간을 품고 있다. 건축물 자체가 무한한 것은 아니지만 짧게 왔다가는 인간들의 유한한 모든 것들을 품고 있는 모체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 초기의 작품은 무엇이었고, 현재 작품과의 연관성과 차이점은?
= 초기에는 풍경으로서 도시를 그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풍경적 요소를 제거하고 건축물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기존에 평면에서 강요 받았던 풍경의 요소, 즉 원근법이나 구도 같은 것이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어 회화적 요소를 없애버린 것이다.
▲ 이번 전시를 설명하면.
= ‘파사드 프로젝트’에 전시된 수묵 건축물은 빼어난 투시와 부감, 채색과 음영으로 생성된 화폭 안 공간으로 관람자들을 초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내 앞에 당당히 평면의 가면을 쓰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를 향해 밀고 나오는 건축물의 파사드들은 모네의 루왕 대성당 연작처럼 빛으로도 나의 눈으로도 잡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다.
한갓 과거 속에 파묻혔던 낡은 껍데기가 아닌, 꼬불꼬불 주름지거나 수직상승하는 문양이 되었든 신묘한 동물과 성자와 신들의 각인이 되었든 파사드 알레고리는 현재의 나를 마중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건축의 어휘를 평면 회화의 어휘로 번역해 가는 번역자의 과제를 수행하며 가히 파사드 프로젝트를 수행중인 것이다.
기념비-경희궁 숭정전, 캔버스천에 수묵, 130x162cm, 2021(사진=이동현기자)
▲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신작 경희궁을 그리게 된 계기는?
= 이번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마리의 장소는 과거 경희궁 터의 일부였다. 이러한 지리적 거점에 기반해 지역과 역사적 사실이라는 연계점을 만들어 이 곳을 방문하는 관람자들에게 보다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
▲ 전시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 파사드는 건축물의 얼굴이자 건축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알레고리이며, 건축가의 독특한 미적 어휘로 구성된 예술작품이다. 내가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의 성당과 뉴욕의 마천루 빌딩, 그리고 우리의 궁궐과 근·현대 건물을 소재로 전통 계화(界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입체감을 드러내는 사실적 표현 없이 오롯이 그것들의 파사드 정면도만으로 아우라와 정면 승부하는 이유이다.
▲ 한지가 아닌 천에 먹으로 작업을 하는 이유는?
= 사실 한지보다 캔버스 천이 붓으로 선을 긋기에는 어려운 재료이다. 한지에 한번에 그으면 될 선을 천에는 5-6번은 그어야 표현이 된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천의 투박함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표현하려는 주제가 너무 기술적으로만 보여지는 것을 적당히 중화시켜 주면서 잘 그려지지 않는 먹 선을 여러 번 긋게 되면 먹이 쌓여가는 깊이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너무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술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을 배제하려는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성향 이기도 하다.
▲ 향후 계획은?
= 작년 7월과 8월에 미국의 뉴저지에 있는 레지던시에서 두 달간 머물 예정이었으며, 그 결과물을 8월에 뉴저지에 있는 갤러리 아트모라에서 전시할 예정이었다. 코로나19로 다 무산되었다.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작년에 못한 일들을 하고 싶다.
▲ 어떤 작가로 기억되기 바라나?
= 본인의 성향을 잘 살피고 이해하며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어느 한 작가를 이루는 새로움 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자신 안에 쌓여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 그 작가의 아우라일 것이다.
자신만의 구조가 완성되었다고 느낄 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한 단계 뛰어 넘는 작가가 되고 싶다.
▲ 이번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 코로나 19로 인하여 비대면이 일반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작가의 실제 작품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갤러리 방문이 힘든 시기이지만 마스크 잘 쓰시고, 방역을 철저히 하시어 안전하게 나들이 해주셨으면 좋겠다. ‘고흐’의 그림을 책으로 배우던 암울한 시대가 다시 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