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무노조 경영' 폐지 약속을 실천하며 시대적 흐름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삼성이 서비스센터 소속 수리기사의 감전사 사망사고에 난처한 상황에 봉책했다.

노동조합 설립 허용과 임금교섭 개최, 준법감시위원회의 안정적 운영 등으로 대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행보에 이어가고 있는 삼성으로서는 예기치 않은 악재를 만난 셈이다. 일각에서는 '무노조 경영'에 익숙해 있는 일부 경영진이 과도한 실적 추구에만 골몰해 달라진 산업 및 사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1일 전국금속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오후 1시50분쯤 삼성전자서비스 디지털양천센터 소속 가전수리기사 윤모(44)씨가 수리를 의뢰한 고객의 집에서 세탁기 수리 업무를 하던 중 감전돼 사망했다,

윤씨는 사고 당일 "세탁기에서 전기가 느껴진다"는 고장신고를 접수받고 그날 오후 1시30분쯤 고객의 집을 방문해 1시41분 수리업무를 위해 전산등록을 한 뒤 10분여만에 사고를 당했다. 작업을 하던 중 물이 튀면서 감전된 윤씨는 곧바로 쓰러졌고 이를 목격한 고객이 1시54분 119에 신고를 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윤씨는 끝내 숨졌다.

삼성전자서비스 소속 가전제품 수리기사 윤모씨가 지난달 28일 숨진 작업 현장. (사진=금속노조)

노조와 윤씨의 동료들은 회사 쪽의 ‘실적 압박’이 사고를 불렀는 입장이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안전을 위협하는 실적 압박을 중단하고 인력을 충원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고인과 함께 근무했던 김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천분회장은 “윤씨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던 친구”라며 “‘우리는 죽도록 일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에 쫓겨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자주했다”며 토로했다.

금속노조는 "각종 대형 가전을 취급하면서 가전 수리 노동자들은 혼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빠르게 업무 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내몰린 상황이다"며 "열악한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게 작업하려면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윤씨를 비롯한 수리 노동자들이 회사의 실적 압박에 시달려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며 작업해왔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몇 건을 처리했는지를 말하는 ‘처리력’, 첫 방문 한 번에 수리를 완료했는지를 말하는 ‘초도 수리율’ 등을 따져 등급을 매기고 진급 여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안전은 뒷전이 됐다는 것이다.

노조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서비스 센터들은 하루에 9건을 처리하면 1만원, 11건을 처리하면 2만원을 주는 식으로 이벤트를 진행하고 실시간으로 처리 현황을 공유하면서 “열외자가 많다. 처리력 집중해달라”는 식으로 기사들에게 공지했다.

삼성전자 소속 수리기사로 8년째 근무 중이었던 윤씨의 사망에 그의 동료는 "회사는 '신속방문', '초고속수리'를 무조건 강요한다"며 "반도체 기술 부문에서 '초(超)격차'를 내세우는 것처럼 참 '초'자를 좋어하는 회사"라고 비꼬았다.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베테랑 직원의 안타까운 사고에 애통한 심정”이라며 “노조가 지적하는 운영상의 문제점을 경청하고 있고 경찰 수사를 통해 파악될 정확한 사고 원인까지 함께 고려해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는 관측이다. 이 부회장이 지난해 5월 대국민 사과에서 1969년 그룹 창립 이후 50여년간 이어져온 무노조 경영 폐지를 선언하며 '정상적인 노사관계' 정립에 노력을 배가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에서 "삼성의 노사문화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 책임을 통감한다"며 "그동안 삼성 노조 문제로 인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표명했다. 이어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노사 관계법령을 철처지 준수하고 노동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지난 1월 삼성디스플레이 노사는 109개 항목에 달하는 ‘단체협약 체결식’을 개최했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 출소 전날인 8월 12일 노조 공동교섭단과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 노사 실무진은 오는 5일 상견례를 열고 2021년 임금교섭 절차와 일정을 협의할 예정이다. 상견례를 시작으로 노사는 향후 주 1회 교섭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확고한 의지에도 계열사를 중심으로 일부 경영진들이 과거의 관행을 답습하거나 노조를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사측은 교섭대표노조와 교섭을 하는 도중 사원협의회인 한마음협의회와 지난달 9일 임금협약을 체결해 논란을 키웠다.

이에 대해 삼성화재손해사정노조는 "이런 행위는 ‘노동조합은 불필요하다’라는 인식을 직원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노조 힘 빼기 및 무력화 작업 시도”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