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의 등장과 함께 인간 바둑의 상징과 같았던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졌다.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의 유일한 승리를 남겼던 이세돌은 끝내 바둑계를 떠났다. 그는 단순히 승패를 떠나 바둑의 본질과 철학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바둑은 더 이상 인간의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는 기도(棋道)의 영역이 아니라,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정답의 게임이 된 현실. 그 변화 속에서 이세돌은 더 이상 자신이 반상에 설 명분을 찾지 못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퇴장하고 인공지능 바둑은 빠르게 대세로 자리잡았다.

#8. 바둑계 포식자의 등장

축구나 야구처럼 실시간 스코어를 볼 수 있는 종목과 달리, 바둑은 관전의 직관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일반 아마추어는 물론이고 프로기사조차 한눈에 유불리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확정가로 보이는 집을 계산하고, 싸움의 가능성, 세력의 두터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바둑의 도입 이후, 중계 화면에는 실시간 승률 그래프가 등장했다. 마치 스코어보드처럼, 반상에서 벌어지는 형세의 흐름이 수치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30회 LG배 세계 기왕전 16강전 신진서 9단 vs. 박정환 9단 기보. (출처=한국기원 홈페이지)


첨부된 장면은 최근 열린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세계 최강을 다투는 두 기사,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의 대국이다. 첫 번째 기보는 44수까지 진행된 상황으로 두 기사의 승률이 50:50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 그러나 40여 수가 더 진행된 두 번째 중반 기보에서는 흑을 쥔 신진서 9단의 승률이 10% 밑으로 급격히 떨어져 있다. 한 수 한 수가 놓일 때마다 승률 그래프는 소수점 단위로 정교하게 출렁인다. AI 바둑은 이제 실시간으로 승부를 판가름하는 절대적인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한때 TV 바둑 중계의 전형은 대형 자석 바둑판 앞에 선 해설자가 돌을 붙였다 떼며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온라인 바둑이 확산되면서 실전 대국 화면 위에 마우스로 돌을 놓는 디지털 해설이 등장했다. 2018년 바둑TV 중계에 AI 프로그램 <돌바람>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인공지능은 바둑 방송의 한 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제 해설자는 실시간 승률 그래프를 바로미터로 삼아, AI가 제시하는 참고도를 바탕으로 정답 수를 화면에 옮기고, 간단한 해설을 덧붙이는 역할로 바뀌었다.

AI 바둑 엔진 'KataGo'로 구동한 GUI 프로그램 'Lizzie'의 실전 화면.

"블루 스폿을 찾아라"

AI 바둑의 작동 원리를 간단히 들여다보자. 위 자료화면은 국내에 널리 알려진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카타고(kataGo)의 예시다. 바둑판 우하귀에서 백이 흑의 소목(小目)에 붙여간 장면이다. AI가 가장 높은 승률을 보이는 지점을 블루 스폿(Blue Spot)으로 표시한다.

백돌의 우측을 젖히는 수는 승률이 50%에 달하며, 흑돌 좌측으로 느는 수는 47.1%를 기록한다. 그런데 전체적인 반상으로 시야를 넓히면 의외로 스폿이 눈에 띈다. 좌하귀 3선을 치받는 수가 48.5%, 우상귀 호구(虎口)를 치는 수 역시 45.9%라는 수치를 보인다.

이처럼 AI 바둑은 실시간으로 최적의 수를 블루 스폿으로 제시하고, 그 외에도 차선·차차선·차차차선 등의 수에 대해 개별적인 가치를 매긴다. 각각의 수에 대해 기대 승률, 사용 빈도, 득실 차이 등 세부 지표를 함께 보여준다. 예상되는 참고도까지 상세하게 구현하고 있으니, AI 바둑은 그야말로 완벽한 스승이다.

"블루 스폿은 AI가 인류에게 추천하는 것이다. 바둑을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수다. 그러나 그 위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현존하는 최강의 인간, 신진서 9단이 인공지능 바둑에 대해 남긴 의미심장한 한마디다.

#9. 인공지능 바둑 연구회

알파고 이후 AI 바둑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프로기사들의 필수 훈련 도구로 자리잡았다. 2019년 이후로는 웬만한 AI를 상대로도 프로기사가 이기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세계 최상위 랭커들조차 고성능 AI에게 3점을 접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프로기사들이 AI에게 바둑을 사사하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극강의 AI 프로그램을 통해 직감이 아니라 정교하게 수치화된 감각을 익힌다. 과거에는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중원의 수나 어깨 짚는 수처럼 생경한 수법이 실전에 등장한다. 정석은 더 이상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는 전략의 일부로 변모했다.

AI 바둑의 가공할 파괴력은 프로기사들의 연구와 훈련 방식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연구회를 통한 전통적인 집단 연구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개개인이 고성능 GPU를 탑재한 고가의 컴퓨터로 개인적인 학습을 하는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바둑 프로그램의 빠른 연산에는 중앙처리장치(CPU)보다 그래픽카드(GPU) 성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을 호가하는 하이엔드급 장비가 연구실 한 켠을 차지하며, 과거 사범님이 앉아 있던 자리를 대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국을 마치면 서로 마주 앉아 한참을 복기(復棋)하는 모습이 승부 세계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국후 일성(一聲)이 바뀌었다.
"돌려봤어?"
AI를 통해 대국을 분석해봤냐는 뜻이다. 복기라는 단어조차도 이제는 찬밥 신세다.

(다음 편에 계속)

바야흐로 AI 세상이다. 2016년 인류에 경종을 울린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은 ‘신들의 게임’이라 불리는 바둑을 한순간에 장악했고, 최근 생성형 AI 챗GPT의 폭발적인 성장은 AI 패권 시대를 앞당겼다. 인공지능의 촉매제가 되었던 바둑을 통해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영역까지 일상에 스며든 AI 별천지를 둘러보고, 당면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AI와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강헌주 PD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