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템, 폴란드에 K2전차 조기납품 (사진=현대로템)
■ 현대로템의 폴란드 수출, ‘무기 산업의 전환점’
현대로템이 폴란드에 K2 전차 180대를 추가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한국 방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계약이 성사됐다. 2022년 1차 계약과 동일한 수량임에도, 개량형 모델 적용과 기술이전 조건이 포함되면서 계약 금액은 두 배에 가까운 9조 원에 달했다.
이번 계약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무기 판매를 넘어 운용 훈련, 정비, 탄약공급, 현지 생산까지 아우르는 전 주기 통합 안보 패키지 모델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방산이 ‘무기를 파는 나라’에서 ‘안보를 공동 설계하는 파트너 국가’로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상징으로 평가된다.
최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는 GDP의 5% 수준까지 국방비를 증액하는 데 합의했다. 유럽연합(EU)도 2030년까지 8000억 유로(약 1270조원) 규모의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다. 전통적으로 유럽 방산시장은 자국 또는 역내 업체에 예산을 우선 배정해왔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양상이 바뀌고 있다.
■ 나토 방위비 증액 “의외의 호재”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가 5년 안에 나토를 공격할 준비를 마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급박한 위기 인식은 ‘속도와 납기’라는 변수에 무게를 실었고 신속 납품과 높은 가성비를 무기로 하는 K-방산에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폴란드 외에도 루마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노르웨이 등 동유럽 국가들이 K-무기체계 도입을 검토하거나 계약 체결에 나서면서, 유럽 전역으로의 확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K2 전차의 이번 수출 계약에는 현지 라이선스 생산과 정비 계약이 포함돼 있다. 방산 기업이 유럽 현지에서 단순 조립을 넘어 산업 생태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 WB그룹과 천무 유도탄 현지 생산 합작법인 설립에 나섰고, LIG넥스원은 루마니아와 대공미사일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무기+산업+외교’가 융합된 하이브리드형 방산 수출 모델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전문가들은 이를 “미국의 FMS 시스템처럼, 한국형 방산외교 플랫폼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2024년 건군 76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열린 중거리지대공유도무기 '천궁' 시가행진 (사진=연합뉴스)
■ 수출의 장애물···인증·R&D·금융 3대 장벽
그러나 마냥 낙관할 수 없다. K-방산의 약진이 이어지, 유럽은 자국 산업 보호에 속도를 내고 있다. EU는 방산 자립을 위해 무기 조달의 역내 비중을 현재 20%에서 2035년까지 65%로 확대할 계획이다. 나토도 회원국 간 무기체계 호환성과 공동 조달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비회원국인 한국에는 입찰 기회 자체가 제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K-방산이 유럽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면 유럽 내 산업기반과 연계된 형태의 전략이 필수다. 현지 합작사 설립, 부품공장 투자, 기술이전과 같은 ‘산업 내화 전략(industrial localization strategy)’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형 방산 외교의 유럽 시장 진입을 본격화하려면 몇 가지 구조적 장벽부터 해소해야 한다다고 국방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먼저 나토 인증체계에 대응할 수 있는 전담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 대부분의 한국산 무기체계는 국내 기준에 맞춰 개발되다 보니, 나토 품질보증협정(AQAP) 같은 국제 기준과 일부 괴리를 보인다.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중심으로 한 수출형 무기 전용 인증 프로세스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체계를 선제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유럽 수출은 번번이 납기 지연과 기술 승인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한 수출형 무기 전용 R&D 투자 확대도 병행돼야 한다. 현장에선 “탄약과 부품 호환성을 위한 맞춤형 설계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하드웨어 스펙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전장 네트워크, 통합 지휘체계, C4I(지휘·통제·통신·컴퓨터·정보) 운용 소프트웨어 등 전투체계 기술력은 미국 의존도가 높다. 지금까지는 고가 수입 소프트웨어로 보완해왔지만 전략 수출국으로 진화하려면 독자적 전투체계 국산화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 현지 생산·합작사·산업동맹…유럽 생태계 진입 관건
여기에 정책금융 지원과 수출 보증 시스템도 새판 짜야 한다. 유럽형 방산 수출은 대부분 수년 단위의 장기 계약 구조로 초기에는 기술이전·현지 생산 등 고비용 구조를 감수해야 한다. 방산 기업들이 단독으로 감당하기에는 재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정책금융 기관이 방산 전용 장기 보증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현지 법인 설립·운영에 필요한 투자자금 보증과 융자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외교적 뒷받침도 필수다. 방산 수출은 단순한 산업 거래가 아닌, 국가 간 전략 협력의 일부로 취급되는 복합 계약이다. 현장에선 “기업 단독으로는 협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국방·외교·산업부를 아우르는 ‘방산 수출 컨트롤타워’ 신설과 함께, 정상급 외교를 동원한 계약 연계 추진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대통령실도 이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수출 심의와 승인 절차에 대한 과감한 규제 완화도 병행돼야 한다. 지금까지는 군수품 수출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행정 절차와 최저가 입찰 기준이 발목을 잡아왔다. 고위험·고가치 산업인 방산의 특성을 감안해 전략물자 수출에 걸맞은 유연한 승인 체계와 예외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대로템의 9조원 폴란드 수출은 단순한 성과가 아니라, K-방산 모델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나토의 방위비 증액은 의외의 기회가 되었고, 앞으로 10년간 유럽 방산 시장은 다시 그 판이 그려질 것이다. 한국이 그 중심에 서려면 이제 ‘무기’가 아니라 ‘관계’를 수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