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라면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세계라면협회가 작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평균 75.1개다. 한 달에 평균 라면 6봉지 이상,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을 먹는셈이다. 이는 2위와 3위를 차지한 네팔(57.6개)과 베트남(56.9개)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뷰어스에서는 1963년부터 시작된 한국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간다. 식량 문제에 시달렸던 1960년대에 탄생한 첫 라면부터 세계 라면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한국라면의 위상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편집자주- 농심이 1986년 출시한 신라면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 1980년대, 황금기 맞은 한국라면 시장 그리고 우지파동 1980년대 한국은 급격한 성장기를 이뤘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눈부신 한국 경제의 성장 현황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라면 시장도 경제 호황에 힘입어 황금기를 맞았다. 비빔면, 해물육수면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개발된 라면들이 대거 등장했다. 70년대보다 라면의 종류가 부쩍 늘었다. 농심은 1982년 너구리,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했다. 이후 1983년 안성탕면, 1986년 신라면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때 출시된 농심의 라면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농심 신라면은 대부분 순한 맛 위주였던 당시 라면시장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충실한 매운맛을 제대로 구현해냈다. 지금은 라면시장 부동의 1위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제품으로 자리매김 했다. 농심은 88 서울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지정돼 라면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도 1983년 라면 시장에 진출했다. 1984년 팔도비빔면과 1986년 도시락을 선보였다. 청보와 빙그레도 각각 1985년, 1986년에 라면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은 더욱 가열화됐다. 오뚜기는 1987년 청보를 인수해 1988년 진라면을 출시했다. 승승장구하던 한국라면시장에서 삼양식품은 시련을 맞는다. 1989년 삼양식품은 우지 파동으로 논란에 휩싸인다. 이는 지난 1962년에 식품위생법이 시행된 이래 최초의 식품 파동이었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을 포함한 5개 기업에서 공업용으로 분류된 우지를 미국에서 수입해 마가린, 라면 등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사건으로 삼양라면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삼양라면의 판매를 중단했다. 7년9개월 간의 법적 분쟁 끝에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삼양식품은 한동안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1000여 명의 인원을 감축했으며 시장점유율은 40%에서 10%로 추락하는 시련을 겪었다. 단종된 빙그레 매운콩라면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 컵라면 등 다양한 신제품과 해외진출 움직임 보여 1990년대 라면시장에는 다양한 신제품이 출시됐으며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 이뤄졌다. 빙그레는 1997년 최초로 MSG를 첨가하지 않은 뉴면과 건강을 화두로 매운콩라면을 출시하는 등 건강을 주제로 시장에서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농심 등 라면업체들은 신라면 큰사발, 튀김우동, 오징어짬뽕, 생생우동, 왕뚜껑, 수타면 등 다양한 맛을 가진 신제품을 풍성하게 선보였다. 또한 냉장면, 냉동면, 생면 등 기름에 튀기지 않은 신제품들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후 1998년 국내 라면시장의 매출 규모가 사상 처음 1조원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라면 수출이 시작됐다. 농심은 90년대에 중국 상하이와 칭다오에,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선양과 미국 LA에 생산시설을 준공했다. 해당국가는 물론 인근 지역에 대한 수출을 더욱 확대하기에 이른다. 삼양식품과 팔도도 해외진출에 나섰다. 특히 팔도 도시락은 19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사업소를 개설한 이후 러시아 매출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설특집 I 라면소비세계 1위] ② 중국으로 역수출, 라면으로 한류...수출 효자 상품 등극

청보와 빙그레도 뛰어든 라면시장, 업계 경쟁 가열되며 다양한 상품 쏟아져
1998년 국내 라면시장 매출 규모 1조원 넘어서

심영범 기자 승인 2021.02.11 09:00 의견 0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라면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세계라면협회가 작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평균 75.1개다. 한 달에 평균 라면 6봉지 이상,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을 먹는셈이다. 이는 2위와 3위를 차지한 네팔(57.6개)과 베트남(56.9개)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뷰어스에서는 1963년부터 시작된 한국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간다. 식량 문제에 시달렸던 1960년대에 탄생한 첫 라면부터 세계 라면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한국라면의 위상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편집자주-

농심이 1986년 출시한 신라면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 1980년대, 황금기 맞은 한국라면 시장 그리고 우지파동

1980년대 한국은 급격한 성장기를 이뤘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눈부신 한국 경제의 성장 현황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라면 시장도 경제 호황에 힘입어 황금기를 맞았다.

비빔면, 해물육수면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개발된 라면들이 대거 등장했다. 70년대보다 라면의 종류가 부쩍 늘었다.

농심은 1982년 너구리,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했다. 이후 1983년 안성탕면, 1986년 신라면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때 출시된 농심의 라면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농심 신라면은 대부분 순한 맛 위주였던 당시 라면시장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충실한 매운맛을 제대로 구현해냈다. 지금은 라면시장 부동의 1위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제품으로 자리매김 했다. 농심은 88 서울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지정돼 라면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도 1983년 라면 시장에 진출했다. 1984년 팔도비빔면과 1986년 도시락을 선보였다. 청보와 빙그레도 각각 1985년, 1986년에 라면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은 더욱 가열화됐다. 오뚜기는 1987년 청보를 인수해 1988년 진라면을 출시했다.

승승장구하던 한국라면시장에서 삼양식품은 시련을 맞는다. 1989년 삼양식품은 우지 파동으로 논란에 휩싸인다. 이는 지난 1962년에 식품위생법이 시행된 이래 최초의 식품 파동이었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을 포함한 5개 기업에서 공업용으로 분류된 우지를 미국에서 수입해 마가린, 라면 등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사건으로 삼양라면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삼양라면의 판매를 중단했다. 7년9개월 간의 법적 분쟁 끝에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삼양식품은 한동안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1000여 명의 인원을 감축했으며 시장점유율은 40%에서 10%로 추락하는 시련을 겪었다.

단종된 빙그레 매운콩라면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 컵라면 등 다양한 신제품과 해외진출 움직임 보여

1990년대 라면시장에는 다양한 신제품이 출시됐으며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 이뤄졌다.

빙그레는 1997년 최초로 MSG를 첨가하지 않은 뉴면과 건강을 화두로 매운콩라면을 출시하는 등 건강을 주제로 시장에서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농심 등 라면업체들은 신라면 큰사발, 튀김우동, 오징어짬뽕, 생생우동, 왕뚜껑, 수타면 등 다양한 맛을 가진 신제품을 풍성하게 선보였다. 또한 냉장면, 냉동면, 생면 등 기름에 튀기지 않은 신제품들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후 1998년 국내 라면시장의 매출 규모가 사상 처음 1조원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라면 수출이 시작됐다. 농심은 90년대에 중국 상하이와 칭다오에,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선양과 미국 LA에 생산시설을 준공했다. 해당국가는 물론 인근 지역에 대한 수출을 더욱 확대하기에 이른다.

삼양식품과 팔도도 해외진출에 나섰다. 특히 팔도 도시락은 19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사업소를 개설한 이후 러시아 매출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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