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라면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세계라면협회가 작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평균 75.1개다. 한 달에 평균 라면 6봉지 이상,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을 먹는셈이다. 이는 2위와 3위를 차지한 네팔(57.6개)과 베트남(56.9개)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뷰어스에서는 1963년부터 시작된 한국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간다. 식량 문제에 시달렸던 1960년대에 탄생한 첫 라면부터 세계 라면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한국라면의 위상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편집자주- (사진=픽사베이) ■ 2차 대전 패배한 일본의 식량난 해소 위해 만들어진 라면 라면은 본래 중국 음식으로 납면(拉麵)에서 유래했다. 납면은 밀가루 반죽을 양쪽에서 당기고 늘려 여러 가닥으로 만든 국수의 한 종류다. 납면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식 발음인 라멘이 됐다. 라멘은 당시 일본에서 닭뼈나 돼지뼈, 멸치, 가다랭이포 등을 우려낸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음식이었다. 납면의 면발이 가늘었다면 라멘은 면발이 다소 굵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일본 닛신(日淸)식품의 회장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에 의해 개발돼 시판됐다. 1950년대의 일본은 제2차 대전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국 이후 최대의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받아 빵을 만들어 먹는 게 일반화돼 있었다. 안도는 어느 날 술집에서 덴뿌라를 기름에 튀기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튀기는 실험 끝에 라면을 개발했다. 안도가 만들어 낸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아지츠케면(味附麵)’은 국숫발에 양념을 묻힌 것으로 끓는 물에 2분만 넣고 끓이면 됐다. 라면은 원래 1950년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주도의 식량부족 대안으로 나오게 된 음식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인스턴트’ 및‘MSG’덩어리 라는 오명과는 달리 초창기 때는 ‘쌀’이나 ‘꿀꿀이죽’을 대체할만한 훌륭한 대체음식으로 평가 받았다.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 (사진=온라인커뮤니티) ■ 삼양식품, 한국 최초의 라면 탄생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삼양식품에서 1963년 출시한 ‘삼양라면’이다. 당시 1봉지 가격은 10원이었다. 삼양식품의 전신인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의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이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묘조식품의 기술을 전수받아 출시했다. 당시 한국은 식량 자체의 부족과 쌀 배급 부진 그리고 식량 보급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첫 출시한 라면은 면에 양념이 반죽돼 있었고 조리법도 생소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라면과 같이 닭고기 국물이 기본이어서 익숙치 않은 맛이었다. 라면이라는 이름 때문에 옷감이나 실, 플라스틱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10원이라는 비싼 가격도 부담이 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의 꿀꿀이족 한 그릇의 가격은 5원이었다. 담배 한값 25원, 커피 한 잔 30원에 비교하면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혼분식 정책과 더불어 삼양의 무료시식회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라면의 인기는 점차 높아져 1966년에는 240만봉지, 1969년에는 1500만 봉지가 판매됐다. 롯데공업(현 농심)이 출시한 롯데라면 (사진=온라인커뮤니티) ■라면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은 삼양과 농심 롯데공업주식회사는 삼양식품에 이어 라면업계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1965년 일본 롯데그룹 무역부장이었던 신춘호가 동생(신격호)의 라면사업을 반대해서 독립해 세운 회사다. 창립 첫 해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에 라면공장을 세우고 롯데라면을 출시했다. 이후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등이 라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라면 브랜드들과 달리 삼양과 롯데공업은 라면 시장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섰다. 삼양식품은 1969년 1월 월남에 국내 최초로 150만불의 라면을 수출했다. 1969년을 기준으로 라면시장 점유율은 삼양라면이 83.3%를 기록했으며 농심은 16.7%로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1970년대부터 라면 제조사들은 연구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입맛에 잘 맞는 라면의 맛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때 형성된 라면의 맛이 지금까지도 한국라면의 기본 맛으로 자리잡으며 한국 라면만의 독자적 개성을 만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농심은 소고기 라면을 개발할 당시 소고기의 맛과 영양을 살리려면 가정이나 유명 식당에서 국물을 내는 방법대로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형 무쇠솥에 소의 고기와 뼈, 간장과 양념을 함께 넣고 푹 고아내는 방법을 고집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농심이 한국음식 특유의 깊고 진한 국물맛을 개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70년 한국라면 시장은 소맥분과 우지가격 인상으로 라면 가격을 20원으로 올렸다. 그러나 삼양식품은 꾸준히 신제품을 선보였다. 1971년 삼양 치킨면을 시작으로 1972년 3월 7일 국내 최초로 컵라면을 판매했다. 이후 1976년 8월 자동판매기로 컵라면을 판매했다. 롯데공업은 1970년 소고기라면, 짜장면을 출시했다. 이후 1975년 소고기를 바탕으로 한 국물라면인 농심라면을 선보였으며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했다.

[설특집 I 라면소비세계 1위] ① 한봉지 10원, 비싸도 너무 비싼 최초의 라면

1963년 삼양라면으로 국내 라면 산업 태동
다양한 라면 업체의 경쟁 그리고 양대산맥으로 우뚝선 삼양식품과 농심

심영범 기자 승인 2021.02.10 09:00 의견 0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라면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세계라면협회가 작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평균 75.1개다. 한 달에 평균 라면 6봉지 이상,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을 먹는셈이다. 이는 2위와 3위를 차지한 네팔(57.6개)과 베트남(56.9개)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뷰어스에서는 1963년부터 시작된 한국라면 역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간다. 식량 문제에 시달렸던 1960년대에 탄생한 첫 라면부터 세계 라면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한국라면의 위상을 연도별로 정리했다. -편집자주-

(사진=픽사베이)


■ 2차 대전 패배한 일본의 식량난 해소 위해 만들어진 라면

라면은 본래 중국 음식으로 납면(拉麵)에서 유래했다. 납면은 밀가루 반죽을 양쪽에서 당기고 늘려 여러 가닥으로 만든 국수의 한 종류다. 납면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식 발음인 라멘이 됐다. 라멘은 당시 일본에서 닭뼈나 돼지뼈, 멸치, 가다랭이포 등을 우려낸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음식이었다. 납면의 면발이 가늘었다면 라멘은 면발이 다소 굵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일본 닛신(日淸)식품의 회장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에 의해 개발돼 시판됐다.

1950년대의 일본은 제2차 대전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국 이후 최대의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받아 빵을 만들어 먹는 게 일반화돼 있었다. 안도는 어느 날 술집에서 덴뿌라를 기름에 튀기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튀기는 실험 끝에 라면을 개발했다. 안도가 만들어 낸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아지츠케면(味附麵)’은 국숫발에 양념을 묻힌 것으로 끓는 물에 2분만 넣고 끓이면 됐다.

라면은 원래 1950년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주도의 식량부족 대안으로 나오게 된 음식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인스턴트’ 및‘MSG’덩어리 라는 오명과는 달리 초창기 때는 ‘쌀’이나 ‘꿀꿀이죽’을 대체할만한 훌륭한 대체음식으로 평가 받았다.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 (사진=온라인커뮤니티)

■ 삼양식품, 한국 최초의 라면 탄생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삼양식품에서 1963년 출시한 ‘삼양라면’이다. 당시 1봉지 가격은 10원이었다.

삼양식품의 전신인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의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이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묘조식품의 기술을 전수받아 출시했다.

당시 한국은 식량 자체의 부족과 쌀 배급 부진 그리고 식량 보급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첫 출시한 라면은 면에 양념이 반죽돼 있었고 조리법도 생소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라면과 같이 닭고기 국물이 기본이어서 익숙치 않은 맛이었다. 라면이라는 이름 때문에 옷감이나 실, 플라스틱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한 10원이라는 비싼 가격도 부담이 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의 꿀꿀이족 한 그릇의 가격은 5원이었다. 담배 한값 25원, 커피 한 잔 30원에 비교하면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혼분식 정책과 더불어 삼양의 무료시식회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라면의 인기는 점차 높아져 1966년에는 240만봉지, 1969년에는 1500만 봉지가 판매됐다.

롯데공업(현 농심)이 출시한 롯데라면 (사진=온라인커뮤니티)

■라면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은 삼양과 농심

롯데공업주식회사는 삼양식품에 이어 라면업계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1965년 일본 롯데그룹 무역부장이었던 신춘호가 동생(신격호)의 라면사업을 반대해서 독립해 세운 회사다. 창립 첫 해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에 라면공장을 세우고 롯데라면을 출시했다.

이후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등이 라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라면 브랜드들과 달리 삼양과 롯데공업은 라면 시장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섰다. 삼양식품은 1969년 1월 월남에 국내 최초로 150만불의 라면을 수출했다.

1969년을 기준으로 라면시장 점유율은 삼양라면이 83.3%를 기록했으며 농심은 16.7%로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1970년대부터 라면 제조사들은 연구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입맛에 잘 맞는 라면의 맛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때 형성된 라면의 맛이 지금까지도 한국라면의 기본 맛으로 자리잡으며 한국 라면만의 독자적 개성을 만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농심은 소고기 라면을 개발할 당시 소고기의 맛과 영양을 살리려면 가정이나 유명 식당에서 국물을 내는 방법대로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형 무쇠솥에 소의 고기와 뼈, 간장과 양념을 함께 넣고 푹 고아내는 방법을 고집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농심이 한국음식 특유의 깊고 진한 국물맛을 개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70년 한국라면 시장은 소맥분과 우지가격 인상으로 라면 가격을 20원으로 올렸다. 그러나 삼양식품은 꾸준히 신제품을 선보였다. 1971년 삼양 치킨면을 시작으로 1972년 3월 7일 국내 최초로 컵라면을 판매했다. 이후 1976년 8월 자동판매기로 컵라면을 판매했다.

롯데공업은 1970년 소고기라면, 짜장면을 출시했다. 이후 1975년 소고기를 바탕으로 한 국물라면인 농심라면을 선보였으며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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