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지폐 흔히 대화로 풀어내자라는 말을 한다. 어떤 갈등이 발생하거나 의견의 대립됐을 때 대화를 통해 서로가 갖고 있는 문제를 확인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대화를 한다고 해서 갈등이 꼭 해결되지 않는다. 실타래 풀리듯 줄줄 이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해가 겹겹이 쌓이기도 한다. 큰 답답함을 느껴 영원한 ‘대화의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까. 생각해보면 쉽다. 대화를 할 때의 태도다. 권력이나 지식, 나이의 서열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인격 대 인격이 동등하게 대화를 하는가, 또는 그러지 못한가의 차이다. 상대를 존중하느냐 안 하느냐로 풀이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입장에 앞서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충분히 이해를 하려하는가 아니면 내 입장만을 고수하는가의 차이도 있을 테다. 상대를 배려하느냐 안 하느냐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태도가 동반된다면 비교적 바람직한 소통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상사와 부하, 형과 동생, 더 넓게 가면 사용자와 노동자, 원청과 하청까지, 존중과 배려가 동반된 대화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적다.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두 가지 태도가 동반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 엄청난 소통의 능력을 발휘한 위인이 있다. 퇴계 이황이다. 성리학의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대학자로서 성리학의 체계를 정립한 이황은 26살이나 어린 기대승과 성리학을 소재로 1:1 승부를 겨룬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이황과 이기겸발설을 주장한 기대승의 논리 싸움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황은 사단으로 불리는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수오지심(옳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시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하줄 아는 마음)’인 이(순수한 마음)와 칠정으로 불리는 ‘희(기쁨)·로(노여움)·애(슬픔)·락(즐거움)·애(사랑)·오(미움)·욕(욕심)’이라는 기(현실적인 감정)를 분리해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사단의 수준을 높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상적인 마음이고, 기는 현실적인 육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분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기대승은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따로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단이라 불리는 네 가지 마음 역시 칠정 속에 속하는 감정의 일부로 판단했다. 이를 두고 ‘이기겸발설’이라고 했고, 이는 차후 이기일원론으로 확장된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기대승의 논리가 맞다. 가령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도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부끄러워하는 마음 역시 욕심과 연결된다.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순수한 마음과 현실적 감정을 분리시키려 했던 이황의 논리는 현실이 늘 존재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이황은 진실에 굴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논쟁은 현재까지도 귀감이 된다. 이황이 기대승을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 국가에서 최고의 명망을 받는 그가 평생을 옳다고 여겨온 신념을 바꾼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이황은 기대승의 의견을 철저히 받아들였다.  아울러 두 사람은 26살에 이르는 나이차뿐 아니라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차, 성균관 대사성과 새내기 선비라는 직책의 차이까지 넘어서서 13년 동안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상논쟁을 펼쳤다. 이는 이황이 기대승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과 배려의 자세로 대화에 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황이 기대승을 풋내기라 여겼다면 작금의 명예로운 이황도 없었을 수 있다. 기대승 역시 편지가 오면 이황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편지를 읽는 등 자신의 의견을 들어준 이황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스승과 제자 모두 타인을 향한 존중과 배려과 충분했다.  이황과 기대승의 일화를 우리에게 대입해보자. 우리는 얼마나 존중과 배려의 자세로 소통하려 하는가. 나이가 어리다고, 서열이 낮다고 하여 경청에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 보다는 내가 가진 신념만 내세우지는 않았는가. 혹여 아무리 옳다 해도 상대의 위치만을 생각해 배우려는 자세는 놓치지 않았는가. 상대의 관점에서 상대의 상황을 먼저 헤아려본 적은 있는가. 되돌아보면 나 역시도 소통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만 해오지는 않아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이제부터라도 이황처럼 존중과 배려를 가진 태도를 갖추고 대화를 해보려는 훈련을 하고자 한다. 내 주위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기대감을 갖고 말이다.

[책에 길을 묻다] ‘이황 기대승 사단칠정을 논하다’ 존중과 배려, 그리고 소통

함상범 기자 승인 2019.11.07 15:25 의견 0
 
사진제공=지폐

흔히 대화로 풀어내자라는 말을 한다. 어떤 갈등이 발생하거나 의견의 대립됐을 때 대화를 통해 서로가 갖고 있는 문제를 확인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대화를 한다고 해서 갈등이 꼭 해결되지 않는다. 실타래 풀리듯 줄줄 이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해가 겹겹이 쌓이기도 한다. 큰 답답함을 느껴 영원한 ‘대화의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까. 생각해보면 쉽다. 대화를 할 때의 태도다. 권력이나 지식, 나이의 서열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인격 대 인격이 동등하게 대화를 하는가, 또는 그러지 못한가의 차이다. 상대를 존중하느냐 안 하느냐로 풀이할 수 있다. 또 자신의 입장에 앞서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충분히 이해를 하려하는가 아니면 내 입장만을 고수하는가의 차이도 있을 테다. 상대를 배려하느냐 안 하느냐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태도가 동반된다면 비교적 바람직한 소통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상사와 부하, 형과 동생, 더 넓게 가면 사용자와 노동자, 원청과 하청까지, 존중과 배려가 동반된 대화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적다.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두 가지 태도가 동반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 엄청난 소통의 능력을 발휘한 위인이 있다. 퇴계 이황이다. 성리학의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대학자로서 성리학의 체계를 정립한 이황은 26살이나 어린 기대승과 성리학을 소재로 1:1 승부를 겨룬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이황과 이기겸발설을 주장한 기대승의 논리 싸움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황은 사단으로 불리는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수오지심(옳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시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하줄 아는 마음)’인 이(순수한 마음)와 칠정으로 불리는 ‘희(기쁨)·로(노여움)·애(슬픔)·락(즐거움)·애(사랑)·오(미움)·욕(욕심)’이라는 기(현실적인 감정)를 분리해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사단의 수준을 높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상적인 마음이고, 기는 현실적인 육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분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기대승은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따로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단이라 불리는 네 가지 마음 역시 칠정 속에 속하는 감정의 일부로 판단했다. 이를 두고 ‘이기겸발설’이라고 했고, 이는 차후 이기일원론으로 확장된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기대승의 논리가 맞다. 가령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도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부끄러워하는 마음 역시 욕심과 연결된다.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순수한 마음과 현실적 감정을 분리시키려 했던 이황의 논리는 현실이 늘 존재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이황은 진실에 굴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논쟁은 현재까지도 귀감이 된다. 이황이 기대승을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 국가에서 최고의 명망을 받는 그가 평생을 옳다고 여겨온 신념을 바꾼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이황은 기대승의 의견을 철저히 받아들였다. 

아울러 두 사람은 26살에 이르는 나이차뿐 아니라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차, 성균관 대사성과 새내기 선비라는 직책의 차이까지 넘어서서 13년 동안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상논쟁을 펼쳤다. 이는 이황이 기대승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과 배려의 자세로 대화에 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황이 기대승을 풋내기라 여겼다면 작금의 명예로운 이황도 없었을 수 있다. 기대승 역시 편지가 오면 이황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편지를 읽는 등 자신의 의견을 들어준 이황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스승과 제자 모두 타인을 향한 존중과 배려과 충분했다. 

이황과 기대승의 일화를 우리에게 대입해보자. 우리는 얼마나 존중과 배려의 자세로 소통하려 하는가. 나이가 어리다고, 서열이 낮다고 하여 경청에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 보다는 내가 가진 신념만 내세우지는 않았는가. 혹여 아무리 옳다 해도 상대의 위치만을 생각해 배우려는 자세는 놓치지 않았는가. 상대의 관점에서 상대의 상황을 먼저 헤아려본 적은 있는가. 되돌아보면 나 역시도 소통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만 해오지는 않아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이제부터라도 이황처럼 존중과 배려를 가진 태도를 갖추고 대화를 해보려는 훈련을 하고자 한다. 내 주위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기대감을 갖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