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과 벽파정 (사진 =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은 군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북쪽 바다 건너로는 해남군 황산면과 마주하고 북서쪽으로 10여km의 해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이 자리하고 있다. 고군면 사람들은 벽파항을 ‘불꺼진 항구’라고 부른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진도와 제주도의 관문이자 인근 해역을 지나는 모든 여객선이 들리는 거점 항구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 벽파항은 고려와 대립하는 한 왕국의 도읍지 항구였고, 수군의 총사령부 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남군 황산면의 삼지원 항이 그러했듯, 벽파항 또한 지난 1984년 길이 484m의 진도대교가 울돌목에 건설된 이후 모든 영화는 과거가 됐으며, 간선도로의 이정표에서 마저도 찾기 힘든 항구로 쇄락했다. 벽파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항구를 10여리 가량 남겨둔 지점에 위치한 ‘용장성터’에서 엿볼 수 있다. 이곳은 1270년부터 4년간, 외세의 침략에 맞서 결코 굴종하지 않았던 ‘삼별초’군이 웅거했던 곳이다. 그들은 몽고와의 화친을 굴욕으로 보고 1천여 척의 배에 병사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물자를 싣고 와 이곳 용장성터에서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벽파항은 바로 이들이 도착한 곳이자 새 도읍지의 해상 관문이었다. 벽파항은 또한 1597년 이순신장군이 해남 우수영 항으로 옮겨 명랑대첩을 치르기 직전 수군을 정비하던 진(항구)이기도 했다. “다리가 놓이기 전 벽파항에는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이 5개나 있었고, ‘해남여관’도 있어 주로 제주도 가는 사람들과 제주 잠수꾼들이 자고 갔습니다.” 20살에 인근 군내면에서 벽파항 마을로 시집왔다는 김팽순(86·벽파리 거주) 할머니는 지금은 식당과 여관 등의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한적한 어촌이 됐지만 당시 벽파항은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소개했다. “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명신호’, ‘문화호’ 등 인근을 해역을 지나는 7~8개 노선의 배가 벽파항에 들렸습니다. 몇 년 전까지도 제주 간 쾌속선이 경유했는데 이제는 여객선이 완전히 끊겼어요.” 벽파리에 거주하는 이초호씨(72)는 벽파항은 이제 불 꺼진 항구라고 말했다. 벽파리 토박이인 손화종(79) 할아버지는 “80년대 무렵 ‘가야호’, 안성호‘ 등의 여객선이 제주도를 오갔다”며 “당시 가야호가 가장 빨랐지만 그래봐야 5시간이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손 할아버지는 이렇게 크고 역사도 깊은 항구가 불이 꺼져서는 안된다며 ’2종 항구‘로라도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벽파항이 큰 항구였음은 20여m 가량 돼 보이는 옛날 여객터미널 건물에서도 드러난다. 터미널 안에는 이 항구의 마지막 여객선이었던 쾌속선의 요금표가 남아있다. 벽파~제주 간 쾌속선 운항 5주년 특별 할인요금이 4만1750원이다. 선사 측에서도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진도 벽파항, 진도대교 개통 후 불 꺼지고 여객선 끊겨

‘삼별초’의 도읍지 항구…제주·진도의 관문, 80년대 초 식당 술집·여관 성업

오승국 기자 승인 2021.11.29 16:32 의견 0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과 벽파정 (사진 =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항은 군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북쪽 바다 건너로는 해남군 황산면과 마주하고 북서쪽으로 10여km의 해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이 자리하고 있다.

고군면 사람들은 벽파항을 ‘불꺼진 항구’라고 부른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진도와 제주도의 관문이자 인근 해역을 지나는 모든 여객선이 들리는 거점 항구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 벽파항은 고려와 대립하는 한 왕국의 도읍지 항구였고, 수군의 총사령부 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남군 황산면의 삼지원 항이 그러했듯, 벽파항 또한 지난 1984년 길이 484m의 진도대교가 울돌목에 건설된 이후 모든 영화는 과거가 됐으며, 간선도로의 이정표에서 마저도 찾기 힘든 항구로 쇄락했다.

벽파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항구를 10여리 가량 남겨둔 지점에 위치한 ‘용장성터’에서 엿볼 수 있다. 이곳은 1270년부터 4년간, 외세의 침략에 맞서 결코 굴종하지 않았던 ‘삼별초’군이 웅거했던 곳이다. 그들은 몽고와의 화친을 굴욕으로 보고 1천여 척의 배에 병사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물자를 싣고 와 이곳 용장성터에서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벽파항은 바로 이들이 도착한 곳이자 새 도읍지의 해상 관문이었다.

벽파항은 또한 1597년 이순신장군이 해남 우수영 항으로 옮겨 명랑대첩을 치르기 직전 수군을 정비하던 진(항구)이기도 했다.

“다리가 놓이기 전 벽파항에는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이 5개나 있었고, ‘해남여관’도 있어 주로 제주도 가는 사람들과 제주 잠수꾼들이 자고 갔습니다.”

20살에 인근 군내면에서 벽파항 마을로 시집왔다는 김팽순(86·벽파리 거주) 할머니는 지금은 식당과 여관 등의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한적한 어촌이 됐지만 당시 벽파항은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소개했다.

“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명신호’, ‘문화호’ 등 인근을 해역을 지나는 7~8개 노선의 배가 벽파항에 들렸습니다. 몇 년 전까지도 제주 간 쾌속선이 경유했는데 이제는 여객선이 완전히 끊겼어요.”

벽파리에 거주하는 이초호씨(72)는 벽파항은 이제 불 꺼진 항구라고 말했다.

벽파리 토박이인 손화종(79) 할아버지는 “80년대 무렵 ‘가야호’, 안성호‘ 등의 여객선이 제주도를 오갔다”며 “당시 가야호가 가장 빨랐지만 그래봐야 5시간이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손 할아버지는 이렇게 크고 역사도 깊은 항구가 불이 꺼져서는 안된다며 ’2종 항구‘로라도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벽파항이 큰 항구였음은 20여m 가량 돼 보이는 옛날 여객터미널 건물에서도 드러난다. 터미널 안에는 이 항구의 마지막 여객선이었던 쾌속선의 요금표가 남아있다. 벽파~제주 간 쾌속선 운항 5주년 특별 할인요금이 4만1750원이다. 선사 측에서도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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