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경제는 산업과 금융, 두 개의 큰 바퀴로 굴러간다. 산업 분야에선 이미 삼성전자라는 세계 1등 기업의 DNA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금융 분야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배출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답답하고 초라한 상황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의 오랜 화두이자 숙제다. 뷰어스는 K금융의 유일한 해법으로 꼽히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과제와 한계점, 금융당국과 금융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은행 수익성(자료=한국신용평가-무디스 공동컨퍼런스 )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만큼 ‘K금융 글로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미국, 영국 등 금융산업이 발달한 국가 입장에서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일 수 있다. 오랜 식민 통치와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이런 잠재력이 높은 시장을 글로벌 자본으로선 외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해외 금융사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잘 나가던 많은 은행들이 한순간 헐값 매물로 전락했다. 평시였다면 꽤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은행업을 영위하는 전통 금융사뿐만 아니라 단기 고수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들까지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국도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시장은 아니었다. 외환은행을 집어삼킨 론스타는 아직도 한국 정부와 분쟁 중이다. 외환위기 이후 10여년이 ‘조한제상서(조흥·한일·제일·상업·서울은행)’에게는 몰락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손바뀜의 시간이 일단락된 뒤 은행업권에서 살아남은 외국자본은 SC그룹과 씨티그룹 두 곳뿐이다. ■ '등잔 밑이 어둡다'...SC·씨티그룹부터 연구해야 격변의 시기 은행 재편 과정에서 SC그룹과 씨티그룹은 어떻게 한국 시장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장에서 그들만의 생존· 비법은 따로 있었던 걸까.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앞장서서 금융기관의 해외진출을 독려하고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해외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성공한) SC그룹과 씨티그룹부터 연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SC그룹은 현재 약 130개 국적의 8만6000여명 임직원들이 52개 나라에서 근무 중인 글로벌 금융그룹이다. 영국계 은행이지만 정작 영국에서는 리테일 영업을 하지 않고 수익의 대부분을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서 거둬들인다. 임직원의 출신 국가 수가 130개국인 것만 봐도 현지화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 회사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씨티그룹 역시 다국적 금융회사의 정체성에 걸맞게 글로벌 경영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한다. 다만, 공격적인 경영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글로벌 영업망을 축소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2021년 한국을 포함한 13개 국가에서 소매금융 철수 방침을 발표하긴 했지만 해외진출 케이스 스터디 대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 진정한 글로벌화는 돈만으로 되지 않는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금융당국이나 은행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글로벌화를 너무 시장 공략 시각으로만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현지 고객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현지화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려운데 역지사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자본들을 홀대하면서 해외에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 이복현 원장은 지난해 9월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 런던을 찾았다. 한국 금융산업이 얼마나 발전했고, 외국 자본에 얼마나 우호적인지 홍보하는 IR(투자설명회) 자리에 SC제일은행은 초대받지 못했다. SC그룹은 한국에 먼저 투자한 외국계 금융사의 산증인임에도 본사가 위치한 런던에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아쉬운 상황은 두 달 뒤에도 있었다. 런던 금융시장 진출이 주요 과제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에서 SC제일은행이 맡은 역할은 없었다.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의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화에 성공한 은행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은 핵심 역량의 글로벌화 집중, 대규모 글로벌 인재 풀 확보, 글로벌 중심 조직 구조 재편 등 3가지다. 이런 특징을 갖춘 조직은 ‘규모의 확대’와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성공한다는 설명이다. ■ 50개국 공통 적용 기준·원칙이 '선진금융기법' 대표적인 사례로는 300여 명의 글로벌 뱅커들을 육성해 해외 영업지역에 금융 역량을 전수하는 SC그룹을 들었다. SC그룹은 영업전략을 짤 때 외부 보고서보다 내부 보고서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50여개 주요국에서 매일매일 시장상황과 영업현황이 보고되기 때문에 굳이 외부 보고서를 참고할 필요가 없는 것. 맥킨지가 강조한 ‘규모의 확대’와 ‘네트워크 효과’가 현실에서 시현된 케이스 중 하나다. 조직 관리 방식도 차별화돼 있다. 전 세계 50여개 나라에 진출했기 때문에 SC그룹 이사진과 경영진은 정기 이사회를 각 나라를 돌며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에 이어 지난해 두 번째로 개최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전 세계 임직원이 참여하는 온·오프 그룹 ‘글로벌 타운홀’ 행사도 한국에서 처음 열렸다. SC그룹은 매년 두 차례 이 행사를 통해 전 세계 임직원들에게 그룹의 경영 현황 및 전략적 우선순위를 전달하고 공유한다. SC제일은행 관계자는 “국내 대형은행들과 영업 경쟁을 하다 보면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때도 분명 있는데 헤드쿼터에서는 이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며 “처음엔 너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50개국 공통에 적용되는 기준과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란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각 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해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리스크 관리 실패에 도달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룹 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는 “그룹 내에 오랫동안 축적돼 온 자산관리, 리스크관리 노하우를 접하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형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며 “요즘 경영진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사항은 진출한 국가의 경제에 기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응답하라 K금융⑤] 등잔밑 'SC·씨티' 왜 안봐?

최중혁 기자 승인 2024.02.21 00:00 의견 0

한 나라의 경제는 산업과 금융, 두 개의 큰 바퀴로 굴러간다. 산업 분야에선 이미 삼성전자라는 세계 1등 기업의 DNA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금융 분야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배출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답답하고 초라한 상황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의 오랜 화두이자 숙제다. 뷰어스는 K금융의 유일한 해법으로 꼽히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과제와 한계점, 금융당국과 금융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은행 수익성(자료=한국신용평가-무디스 공동컨퍼런스 )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만큼 ‘K금융 글로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미국, 영국 등 금융산업이 발달한 국가 입장에서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일 수 있다. 오랜 식민 통치와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진입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이런 잠재력이 높은 시장을 글로벌 자본으로선 외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해외 금융사들이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잘 나가던 많은 은행들이 한순간 헐값 매물로 전락했다. 평시였다면 꽤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다. 은행업을 영위하는 전통 금융사뿐만 아니라 단기 고수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들까지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국도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시장은 아니었다. 외환은행을 집어삼킨 론스타는 아직도 한국 정부와 분쟁 중이다. 외환위기 이후 10여년이 ‘조한제상서(조흥·한일·제일·상업·서울은행)’에게는 몰락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손바뀜의 시간이 일단락된 뒤 은행업권에서 살아남은 외국자본은 SC그룹과 씨티그룹 두 곳뿐이다.

■ '등잔 밑이 어둡다'...SC·씨티그룹부터 연구해야

격변의 시기 은행 재편 과정에서 SC그룹과 씨티그룹은 어떻게 한국 시장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장에서 그들만의 생존· 비법은 따로 있었던 걸까.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앞장서서 금융기관의 해외진출을 독려하고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해외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성공한) SC그룹과 씨티그룹부터 연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SC그룹은 현재 약 130개 국적의 8만6000여명 임직원들이 52개 나라에서 근무 중인 글로벌 금융그룹이다. 영국계 은행이지만 정작 영국에서는 리테일 영업을 하지 않고 수익의 대부분을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에서 거둬들인다. 임직원의 출신 국가 수가 130개국인 것만 봐도 현지화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 회사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씨티그룹 역시 다국적 금융회사의 정체성에 걸맞게 글로벌 경영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한다. 다만, 공격적인 경영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글로벌 영업망을 축소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2021년 한국을 포함한 13개 국가에서 소매금융 철수 방침을 발표하긴 했지만 해외진출 케이스 스터디 대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 진정한 글로벌화는 돈만으로 되지 않는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금융당국이나 은행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글로벌화를 너무 시장 공략 시각으로만 접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현지 고객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현지화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려운데 역지사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자본들을 홀대하면서 해외에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 이복현 원장은 지난해 9월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 런던을 찾았다. 한국 금융산업이 얼마나 발전했고, 외국 자본에 얼마나 우호적인지 홍보하는 IR(투자설명회) 자리에 SC제일은행은 초대받지 못했다. SC그룹은 한국에 먼저 투자한 외국계 금융사의 산증인임에도 본사가 위치한 런던에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아쉬운 상황은 두 달 뒤에도 있었다. 런던 금융시장 진출이 주요 과제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에서 SC제일은행이 맡은 역할은 없었다.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의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화에 성공한 은행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은 핵심 역량의 글로벌화 집중, 대규모 글로벌 인재 풀 확보, 글로벌 중심 조직 구조 재편 등 3가지다. 이런 특징을 갖춘 조직은 ‘규모의 확대’와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성공한다는 설명이다.

■ 50개국 공통 적용 기준·원칙이 '선진금융기법'

대표적인 사례로는 300여 명의 글로벌 뱅커들을 육성해 해외 영업지역에 금융 역량을 전수하는 SC그룹을 들었다. SC그룹은 영업전략을 짤 때 외부 보고서보다 내부 보고서를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50여개 주요국에서 매일매일 시장상황과 영업현황이 보고되기 때문에 굳이 외부 보고서를 참고할 필요가 없는 것. 맥킨지가 강조한 ‘규모의 확대’와 ‘네트워크 효과’가 현실에서 시현된 케이스 중 하나다.

조직 관리 방식도 차별화돼 있다. 전 세계 50여개 나라에 진출했기 때문에 SC그룹 이사진과 경영진은 정기 이사회를 각 나라를 돌며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에 이어 지난해 두 번째로 개최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전 세계 임직원이 참여하는 온·오프 그룹 ‘글로벌 타운홀’ 행사도 한국에서 처음 열렸다. SC그룹은 매년 두 차례 이 행사를 통해 전 세계 임직원들에게 그룹의 경영 현황 및 전략적 우선순위를 전달하고 공유한다.

SC제일은행 관계자는 “국내 대형은행들과 영업 경쟁을 하다 보면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때도 분명 있는데 헤드쿼터에서는 이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며 “처음엔 너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50개국 공통에 적용되는 기준과 원칙에 입각한 결정이란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각 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해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리스크 관리 실패에 도달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룹 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는 “그룹 내에 오랫동안 축적돼 온 자산관리, 리스크관리 노하우를 접하다 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형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며 “요즘 경영진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사항은 진출한 국가의 경제에 기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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