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1991년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이기도 했지만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소련의 붕괴가 대한민국에 미친 여파는 컸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 시절 독재타도를 외치던 운동권 학생들은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장수를 잃은 부대처럼 구심점을 잃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보려 했지만 뒤이어 등장한 ‘X세대’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렇게 체제경쟁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난 줄 알았다. 중공도 개혁개방에 나서며 ‘시장경제’로 노선을 틀었고,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들에도 독립과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오로지 북한만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며 변함이 없었지만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마당에 오래 버티기 힘들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그로부터 약 30년. 북한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도 푸틴과 시진핑의 주도 아래 과거 체제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며 체제 지키기에 몰입 중이고, 중국 역시 미국의 압박에 맞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는커녕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접어든 양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어쩌다 이런 모습을 다시 목도하게 된 것일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예언한 세계 국가체계의 자유민주주의 일원화는 왜 현실이 되지 못했을까. 승리 후 자만? 노력의 부족? 잘못된 방향 설정? 아니면 다른 그 무엇?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고르바초프가 실권하던 시점의 기대대로라면 북한을 포함한 많은 권위주의 국가 인민들은 지금 자유와 풍요를 맘껏 누리며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과연 우리 세계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만큼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현실이 기대와는 너무 달라서, 질문을 달리 해볼 도리밖에 없다. 과연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사회주의 진영의 자유와 풍요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전 세계인의 자유와 번영은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자국의 자유와 풍요만을 탐해 왔던 것은 아닐까. 3년 전 독일에서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그리스의 최대 난민 캠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거리에 나앉게 생긴 난민들을 독일의 주도 아래 주변국들이 십시일반 수용하기로 했다. 독일은 이후에도 1500여 명을 추가 수용하기로 했는데, 독일 국민들은 ‘더 수용할 수 있다’며 정부에 행동 전환을 촉구했다. 난민을 받지 말자고 시위한 게 아니라, 난민을 더 받자고 시위를 한 것이다. 나눔과 배려, 인류애를 보여주는 독일 국민들의 이런 수준 높은 시민의식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으로서 뼈아픈 반성을 거듭한 끝에 이뤄졌다. 반성은 교육을 통해 전승됐다. 그렇게 전범국 독일의 국민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윤리의식이 투철한, 수준 높은 세계시민으로 거듭났다. 만약 일본에서도 전후 독일에 버금가는 반성과 교육이 뒤따랐다면 한중일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갈등 양상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지난 냉전시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이 뒤따랐다면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이 똘똘 뭉치는 지금의 신냉전체제는 아마도 쉽게 도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30년 ‘세계화 시대’에 미국은 공존을 위한 적정수익보다 약육강식을 통한 최대수익을 추구했다.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시장개방 압력을 가하며 패권국의 약탈적 지위를 지키고, 누리려 애써 왔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들의 욕망 주머니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가 훨씬 중시돼 중산층이 무너졌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세계화의 열매가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양극화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이런 약한 고리를 트럼프는 동물적 감각으로 공략해 성공에 이르렀다. 난민을 더 수용하라는 독일 국민들 정도의 시민의식이 형성됐다면 결코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1인당 GDP 7만달러를 넘긴 나라가 힘들어 죽겠다며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택한다면 다른 나라들의 선택지는 명확해진다. 공존을 위한 나눔과 배려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각자도생만이 남을 뿐이다. 다시 도래한 ‘생존의 시대’를 맞아 윤석열 정부는 재빨리 일본과 손을 잡고 미국 진영으로 발길을 옮겼다. 러시아 및 중국과 공존을 모색하던 독일도 자의반 타의반 미국 편에 섰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국민의 수준은 교육의 수준이 좌우한다. 2차대전 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독일이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다음 주에 한국에선 수능이 치러진다. 주어진 시간에 실수하지 않고 누가 정답을 빨리 찾아내느냐를 가리는 시험이다. 무한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공식 출발점이기도 하다. 비행기까지 멈추며 온 나라가 숨죽이는 이 날, 우리 미래 세대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을까. 국어든, 역사든, 영어든, 사회든 지문 한 단락 만이라도 공존을 위한 나눔과 배려의 내용이 담겨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

[포르코의 뷰] 생존과 공존, 그리고 ‘수능’ 지문에 담겨야할 것들

최중혁 기자 승인 2023.11.08 08:37 | 최종 수정 2023.11.08 09:17 의견 0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1991년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이기도 했지만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소련의 붕괴가 대한민국에 미친 여파는 컸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 시절 독재타도를 외치던 운동권 학생들은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장수를 잃은 부대처럼 구심점을 잃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보려 했지만 뒤이어 등장한 ‘X세대’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렇게 체제경쟁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난 줄 알았다. 중공도 개혁개방에 나서며 ‘시장경제’로 노선을 틀었고,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들에도 독립과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오로지 북한만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며 변함이 없었지만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마당에 오래 버티기 힘들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그로부터 약 30년. 북한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도 푸틴과 시진핑의 주도 아래 과거 체제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며 체제 지키기에 몰입 중이고, 중국 역시 미국의 압박에 맞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는커녕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접어든 양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어쩌다 이런 모습을 다시 목도하게 된 것일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예언한 세계 국가체계의 자유민주주의 일원화는 왜 현실이 되지 못했을까. 승리 후 자만? 노력의 부족? 잘못된 방향 설정? 아니면 다른 그 무엇?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고르바초프가 실권하던 시점의 기대대로라면 북한을 포함한 많은 권위주의 국가 인민들은 지금 자유와 풍요를 맘껏 누리며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과연 우리 세계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만큼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현실이 기대와는 너무 달라서, 질문을 달리 해볼 도리밖에 없다. 과연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사회주의 진영의 자유와 풍요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전 세계인의 자유와 번영은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자국의 자유와 풍요만을 탐해 왔던 것은 아닐까.

3년 전 독일에서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 그리스의 최대 난민 캠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거리에 나앉게 생긴 난민들을 독일의 주도 아래 주변국들이 십시일반 수용하기로 했다. 독일은 이후에도 1500여 명을 추가 수용하기로 했는데, 독일 국민들은 ‘더 수용할 수 있다’며 정부에 행동 전환을 촉구했다. 난민을 받지 말자고 시위한 게 아니라, 난민을 더 받자고 시위를 한 것이다.

나눔과 배려, 인류애를 보여주는 독일 국민들의 이런 수준 높은 시민의식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으로서 뼈아픈 반성을 거듭한 끝에 이뤄졌다. 반성은 교육을 통해 전승됐다. 그렇게 전범국 독일의 국민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윤리의식이 투철한, 수준 높은 세계시민으로 거듭났다. 만약 일본에서도 전후 독일에 버금가는 반성과 교육이 뒤따랐다면 한중일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갈등 양상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지난 냉전시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이 뒤따랐다면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이 똘똘 뭉치는 지금의 신냉전체제는 아마도 쉽게 도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30년 ‘세계화 시대’에 미국은 공존을 위한 적정수익보다 약육강식을 통한 최대수익을 추구했다.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시장개방 압력을 가하며 패권국의 약탈적 지위를 지키고, 누리려 애써 왔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들의 욕망 주머니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가 훨씬 중시돼 중산층이 무너졌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세계화의 열매가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양극화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이런 약한 고리를 트럼프는 동물적 감각으로 공략해 성공에 이르렀다. 난민을 더 수용하라는 독일 국민들 정도의 시민의식이 형성됐다면 결코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1인당 GDP 7만달러를 넘긴 나라가 힘들어 죽겠다며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택한다면 다른 나라들의 선택지는 명확해진다. 공존을 위한 나눔과 배려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각자도생만이 남을 뿐이다. 다시 도래한 ‘생존의 시대’를 맞아 윤석열 정부는 재빨리 일본과 손을 잡고 미국 진영으로 발길을 옮겼다. 러시아 및 중국과 공존을 모색하던 독일도 자의반 타의반 미국 편에 섰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국민의 수준은 교육의 수준이 좌우한다. 2차대전 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독일이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다음 주에 한국에선 수능이 치러진다. 주어진 시간에 실수하지 않고 누가 정답을 빨리 찾아내느냐를 가리는 시험이다. 무한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공식 출발점이기도 하다. 비행기까지 멈추며 온 나라가 숨죽이는 이 날, 우리 미래 세대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을까.

국어든, 역사든, 영어든, 사회든 지문 한 단락 만이라도 공존을 위한 나눔과 배려의 내용이 담겨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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