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vN)
[뷰어스=손예지 기자] 다음은 지난 22일 방송한 tvN ‘미스터 션샤인’ 6회의 한 장면이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미 해병대 장교가 된 유진 초이(이병헌). 미국인 여성이 베이비시터로 고용한 조선인 여자아이의 뺨을 때리자 “그들은 노비가 아니라 노동자”라며 말린다. 이에 여성은 “같은 조선인이라고 편을 드는 것이냐”고 따진다. 유진이 “같은 미국인으로서 품위를 지키라는 말”이라고 답하자 여성은 “내가 왜 조선인 앞에서 품위를 지키냐. 조선은 무례하고 미개하다”고 폭언을 퍼붓는다. 듣고 있던 유진 초이는 반박하는 대신 말을 돌린다.
‘미스터 션샤인’에는 이처럼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취급하는 외국인의 대사가 다수 등장하나 그때마다 남자주인공 유진은 침묵한다.
‘미스터 션샤인’의 또 다른 남자주인공 구동매(유연석)는 우익단체 ‘무신회’의 한성지부장을 맡은 인물로 설정됐다. 이에 따라 동매의 대사는 절반 이상이 일본어이며 의상도 일본식으로 차려 입는다. 지난 5회에서 동매는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은 일본인에게 “벌거벗고 돌아다녀 제국의 체면을 훼손하지 말라”고 호통친다.
조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에 어째서 남자주인공이 죄다 미국인과 일본인을 자처하는가 의문이 드는 찰나, 또 다른 남자주인공 김희성(변요한)이 등장한다. 10여년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희성이다. 앞선 두 사내와 달리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인식은 갖고 있으나 노름과 유희에 빠져사는 한량으로 그려진다.
“한일합병 직전, 끝까지 항거했던 의병(義兵)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던 ‘미스터 션샤인’이 베일을 벗은 뒤 적지 않은 시청자가 실망한 이유다. 부모의 피를 물려받아 의병의 길을 걷는 여자주인공 고애신(김태리)를 제외하면 주요 캐릭터 대다수가 조선을 적(敵)으로 두거나 무능하다. 애신 외의 의병으로는 활빈당이 대사로 몇 번 언급됐을 뿐이다.
(사진=tvN)
‘미스터 션샤인’은 24부작으로 만든 드라마다. 이제 4분의 1이 방송됐다. 만일 ‘미스터 션샤인’이 친미하거나 친일하던 남자주인공들이 애신에 동화돼 의병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다면 이제 슬슬 변화의 여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6회까지, 아직 그런 기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혹자는 당대 친일파 등 변절자들이 앞장서 자국민을 괴롭히거나 외침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진 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미스터 션샤인’은 이를 현실적으로 그렸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무릇 시대극이 역사 속 비극을 그릴 때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한계점을 찾아 비판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 동일선상에 외세에 의하여 달라진 환경을 긍정적으로 비추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다’… 일본이 조선에게 끊임없이 주입하고자 했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가령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유진과 동매가 각각 미국과 일본의 권력을 등에 엎고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동안 희성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양장과 가배(커피) 등 근대화의 상징들을 즐긴다는 설정에서 나타난다.
여기에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드라마는 그 무엇보다 파급력이 큰 TV를 매체로 공급되는 콘텐츠다.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영화나 연극과 달리 향유층의 범위가 비교적 넓으므로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도 이에 비례한다. 더욱이 ‘미스터 션샤인’은 현재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여개국에 동시 방영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해외 시청자에게는 ‘미스터 션샤인’이 곧 우리의 역사,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다. 이응복 PD는 이와 관련해 지난달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미스터 션샤인’은 해외 수출용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사간 이유도 잘 모르겠다”며 “잘 만들어서 아니겠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제작진의 의도나 계획과 별개로 해외 수출이 결정됐다고 해도 이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사진=tvN)
‘미스터 션샤인’ 제작진은 최근 구동매 캐릭터가 친일 미화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설정을 전면 수정했다. 애초 공식 홈페이지와 제작발표회는 구동매가 흑룡회에 소속된 인물이라고 소개했었다. 흑룡회는 실존했던 우익단체로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바 있다. 제작진 역시 기획단계에서 인지했으며 홈페이지 소개란에 이를 직접 기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 속 실제 단체를 배경으로 삼은 점이 옳지 않음을 지적받아 가상의 단체로 극을 수정했다. 이미 촬영을 마친 부분이라도 앞으로 방영될 방송분을 수정키로 결정했다”며 “친일 미화의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 민감한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인 만큼 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깨달았다”고 사과했다.
반면 이에 앞선 1회에서 이완익(김의성)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선을 드리겠다”며 ‘운요호 사건’을 먼저 제안하는 장면을 내보낸 데 대해서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이 장면은 ‘미스터 션샤인’이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명백하게 범한 역사왜곡이다.
이에 지난 16일 한 네티즌은 ‘미스터 션샤인’을 역사왜곡 드라마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및 역사 관련 정부 기관의 경고 조치를 요구하는 취지의 청원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했다. 이 글은 24일 오전 11시 기준, 2만3586명의 동의를 얻고 있다.
이 같은 논란에도 ‘미스터 션샤인’의 시청률은 높아져만 간다. 첫 방송 시청률 8.9%로 출발한 ‘미스터 션샤인’은 지난 22일 방송된 6회 시청률 11.7%까지 치솟았다.(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전국 기준, 이하 동일) 단 한 차례 하락 없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시청률은 ‘면죄부’가 아니다. ‘미스터 션샤인’에 관심 두는 시청자가 느는 만큼, 제작진은 더욱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남은 이야기를 이끌어야 할 터다. 그리하여 앞선 논란과 의혹을 깨끗이 씻어내고 시대극으로서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