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가 흥행이다. 개봉 전의 큰 관심은, 개봉 후에는 그 폭이 커졌다. ‘N차 관람’은 기본이고 호아킨 피닉스의 전작들도 거론되다. 패러디한 영상이나, 사진은 당연하게 등장했다. 한동안 이 분위기는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조커’는 평범했던 광대 아서 플렉이 ‘희대의 빌런’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고담시에서 아서 플렉의 자리는 없었고, ‘예의 없이’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증오의 감정을 키웠다.
조커를 본 관객들은 ‘섬뜩하다’는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포털사이트 평점이든, 자신의 블로그든, 개인 SNS든 영화평을 남길 수 있는 공간에는 여지 없이 ‘착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있다. 비슷한 시대이고, 똑같은 고담시이며, 할리우드 영화지만, ‘배트맨’과 확연히 다른 결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여기에 한국 사회를 투영시킨다. 빈부 격차와 ‘빈자’의 감정 폭발.
‘아동 학대를 당한 조커가 빈부 격차가 극심한 사회에서 광대로서의 어려운 삶을 이어가면서도, 또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차별받으며 살아간다’는 스토리는 아서 플렉 개인만 보자면 안타까운 일이고, 복지와 삶의 안전장치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이 삶과 사회가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의 범죄를 정당화 하진 못한다. 그의 불행한 삶과 사회의 부당한 시스템이 그가 타인을 해할 권리를 부여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여되지 않은 권리를 발산할, 혹은 발산하고 있는 수많은 조커와 조커가 될 이들이 한국에도 존재하고 있다. 속칭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세상을 탓하고 자신의 불행한 삶을 탓하는 뉴스를 우리는 수없이 접하곤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발생한 살인사건(미수 포함) 914건 가운데 ‘현실 불만’에 의한 살인이 44건이다. 한 달에 3~4건이다. 여기에 집계되지 않는 폭행과 온라인상 폭력과 동조까지 고려한다면, 단순히 ‘일어난 살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 사회의 그 누군가는 당신처럼 범죄를 저지르진 않는다”라는 말로 이들의 범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느 시기부터 공허해진 말이 되어버렸다. 사회의 안전장치가 작동되지 않고, 상대적 박탈감이 커 갈수록 “너희가 내 삶을 아냐”는 목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범죄가 늘어나는 셈이다.
빈부 격차가 심해질수록,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수록, 사회 안전망이 무너질수록, 세상의 조커들은 앞으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해법? 이미 정해져 있다. 단지, 내 것을 내려놓기 싫어하면서 해법을 찾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