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유튜브 '진리상점' 캡쳐
설리의 사망 이유가 악성댓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가장 큰 원인으로 진단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다시 불거진 ‘악성댓글에 대한 비판’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의문이다. 답답하지만 현실적인 질문이다. 악성댓글에 대한 비판은 수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단지 20대 연예인의 안타까운 사망으로 인해, ‘약간 조금 더’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그라질 것이고, 악성댓글로 배설하던 이들은 다시 그 맛을 찾아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릴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연예인의 잘못 혹은 ‘불편한 말과 행동’에 대해 대중은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서 자격이 된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라고 종종 말한다. 그들이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를 봐주고, 음악을 들어주며, 광고에 출연하게 해주는 등 그들의 ‘수익’은 ‘나’라는 대중을 통해서 발생하니, 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비판 혹은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정해주지 않은 그 ‘수위’의 기준은 희한하게도 어느 정도 공유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연예인에게 공인(公人)의 책임과 도덕성도 부여한다. 원래 공인이 아닌 사인(私人)이지만,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로 공인으로 종종 분류된다. (본인들이 ‘공인으로 책임을 다하지’ 등의 말은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여하튼 그러다보니, 이들은 종종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어도 ‘지적’을 받는 마당에, 자칫 길 가다가 무단횡단이라도 했다가는 사회에서 매장을 당한다. 사과는 당연하고, 평소 구설에 올랐던 이라면 프로그램이나 작품에서 하차해야 한다.
정치인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웃기고 앉았네, 병신 같은 게”라는 말을 해도 자리를 유지하지만, 연예인이 (작품이 아닌)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저런 말을 했다가는 ‘논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과하거나 하차해야 한다. 그 기준은 역시 누가 정해준 것은 아니지만, ‘자격 있는 대중’들의 인터넷 속 공감대로 정해진다.
과거 어느 매니저는 “비난을 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수준으로 해야 하지 않냐”라며 악성댓글에 대해 말했다. 황당했다. 그 매니저는 악성댓글도 인기가 있어야 나오는 것이라며,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을 했다. 당황했다. 어쨌든 ‘돈벌이 수단’으로서만 연예인을 바라본 것이다. “비난을 하더라도 상품이 다치지 말 정도만 하자”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매니저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시 따져보자. 연예인을 비판할 자격이 대중에게 분명 있다. 중요한 것은 ‘비판’이란 영역이다. 연기력이 떨어지거나 노래를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노력도 안하면서 ‘소비되는 대상’으로 남으려 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비판이 필요하다. 어쨌든 대중이 소비자니까 말이다. 그러나 ‘비난’은 대상의 행위에 따라 범위가 정해진다. 연예인이 성폭행을 하거나, 탈세, 폭행, 마약 등의 위법 행위를 했을 때는 분명 비난할 자격이 대중에게 주어진다. 특히 평소 특정 이미지로 콘서트 광고 등을 통해 대중의 지갑을 열게 했는데, 그 이미지를 배신한다면 비난의 폭주는 어찌할 수 없다. 유승준, 신정환, 고영욱이 그랬다. 때문에 대중의 비난이 발생할 때, 그 누구도 여기에 제동을 하지 않았다. 역으로 아무 때나 연예인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특정한 행동 때문에 행해지는 비난을 넘어서, 아예 ‘근거 없는’ 혹은 ‘자기 만족용’ ‘배설용’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악성댓글은 범죄고, 그 누구에게도 향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이 선까지 넘어오는 대중은 ‘자격’을 상실했다. 그리고 그 자격을 상실한 대중들이 여전히 키보드 앞에서 ‘배설 행위’를 하고 있고, 결국 타인의 생명도 앗아가는 사회를 만든다.
영화 ‘기생충’에서 사회 계급의 키워드로 ‘냄새’를 내밀었다. 문득 설리의 사망 기사에, 설리를 추모하는 동료 연예인의 SNS에 여전히 ‘자기 만족용 배설’을 하는 이들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