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동양생명 주가 흐름(자료=네이버)
올해 국내 생명보험사들의 주가 흐름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패턴이 발견됩니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기대감으로 1~2월 상승세를 타다 정점을 찍고 3~4월에는 하락 흐름, 5월부터는 소폭 반등 뒤 횡보 구간입니다. 삼성생명, 한화생명, 미래에셋생명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유사합니다.
이와는 달리 동양생명은 이 같은 패턴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습니다. 다른 생보주들이 하락 흐름을 보이던 6월 오히려 급등합니다. 지난 6월 18일 동양생명은 장중 가격제한폭까지 올랐다 조금 후퇴한 6500원(24.05%)에 마감합니다. 평소 10만주 안팎이던 거래량은 963만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급등은 동양생명이 잠재적 매물로 나와있다보니 M&A 재료가 힘을 발휘한 영향입니다. 실제로 당일 증권가에는 ‘하나금융 인수설’이 확산됐습니다. 물론 동양생명은 곧바로 사실이 아니라는 조회공시 답변을 내놨고, 하나금융도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이렇듯 다들 부인을 하면 이후 주가는 상승분을 토해내는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동양생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주가는 견조한 흐름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금융지주가 동양·ABL생명 대주주와 비구속적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실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18일 당시 동양생명이 장중 상한가를 찍었던 기세는 우리금융 MOU 정보를 미리 입수한 누군가가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18일 전후로 동양생명을 사들인 주체는 누굴까.
당일(18일) 수급을 보면 투신 등 기관자금이 110만주 넘게 유입됐습니다. 개인이 100만주 가깝게 팔아치운 물량을 싹쓸이한 것이지요. 전일인 17일에도 기관은 36만주 넘게 매입했습니다. 앞서 13일까지 14거래일 연속 순매도하던 기관이 이날 이후 수십만주씩 지속적으로 동양생명 주식을 사들입니다. 그때부터 7월 2일까지 13일 연속 순매수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동양생명 매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증권 혹은 IB쪽 누군가가 확인하고, 일부 친한 기관들에 알립니다. 인수자는 우리금융 아니면 하나금융 둘 중 한 곳. 금융지주가 인수하면 동양생명의 상장폐지 가능성은 급격히 올라갑니다. 100% 자회사를 만들어야 재무적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인수만 확정되면 동양생명 주가는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뢰할만한 정보원에 따르면 인수가 아주 임박했습니다. 밀어부칩시다."
사실 이 같은 상황은 주식시장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불공정 거래’ 가능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온통 매각의 성사 여부, 적정 가격 등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아마도 ‘문제제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학습효과도 크겠지요. 불공정 거래를 입증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부 고발자가 명백한 증거를 갖고 신고하지 않는 한 진상이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강한 의심이 들어도 ‘향후 전망이 밝아 보여서 샀다’라고 발뺌하면 처벌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황증거만으로 벌할 순 없으니까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가 급등이 처벌로 이어진 사례가 극히 드문 이유입니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지 몇몇 전문가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전반적인 매커니즘은 비슷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고 합니다. 처벌의 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걸려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지만 미국에서는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습니다. 불공정 거래로 발생한 부당이익을 환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몇 배에 달하는 벌금을 때립니다. 직접투자보다는 간접투자 문화가 발달한 점도 차이점이라고 하더군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금융감독원장에 사상 최초로 검사 출신 인사가 임명됐을 때 많은 이들이 기대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가 판을 치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좀 더 공정하고 투명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복현 원장 취임 3개월 뒤인 2022년 9월 금감원은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대응역량 강화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높은 책임성이 요구되는 상장사 임원의 미공개중요정보 이용, 불공정거래 전력자의 위법행위 반복 등이 빈번히 발생함에 따라 다수 일반투자자가 금전적 피해를 입고 우리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도 훼손시키고 있다”고 문제를 직시했습니다. ‘불공정거래는 갈수록 다양화‧복잡화되고 있으나 그 처벌, 차단, 예방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반성도 곁들였습니다.
그 뒤로 조사 강화, 의지 천명, 특별 단속, 처벌 강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에 엄포성 자료를 뿌려댔지만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지난주 불공정거래 신고 포상금 지급 실적을 발표하면서 ‘상반기에만 1억1330만원이 지급됐다’며 자화자찬한 정도가 전부입니다. '지난 10년 실적과 비교하면 58% 증가한 금액인데 금융당국의 제도개선 및 적극적인 포상 노력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고 자평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사실 근원적인 처방은 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미국처럼 인생과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처벌이 엄격하다면 어땠을까요. 금감원은 실제 2022년 대책 발표 당시 ‘불공정거래에 대한 부당이득 산정방식 법제화 및 과징금 도입 법안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지속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역시 함흥차사입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복현 원장은 ‘금융대통령’으로 불립니다. 차관급 원장이 권한을 넘어서는 발언을 시장에 마구 쏟아내는 데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아끼는 사람인데 괜히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 ‘버럭 대통령’의 원성을 사면 어쩌나 몸을 사린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옵니다. 공매도 금지, 상생 금융 등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에 총대를 메더니 지금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드라이브를 겁니다. 금융위원장도 금감원장 기호에 맞아야 자리를 꿰찰 수 있습니다.
많은 동학 개미들이 불공정하고 불투명한 국내 주식시장을 떠나 서학 개미로 변신 중입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이유야 많겠지만 미공개정보이용, 시세조종, 부정거래 등 불공정거래를 엄단하는 것 역시 공정·투명한 시장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사상 최초 검사 출신 이복현 금감원장이 취임한 지 2년이 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나요. 이제 말과 계획이 아니라 성과를 보여줄 때입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위원장이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장기업회관에서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한국경제인연합이 공동 주최한 '기업 밸류업 지배 구조 개선 세미나'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2024.6.26(자료=연합뉴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