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금융감독원 브리핑룸에서 우리금융과 홈플러스, 상법개정안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2025.3.19(자료=연합뉴스)
“임기가 2주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을까요?”
지난주 만난 한 취재원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원장은 금감원 역사에 여러 모로 한 획을 긋는 인물인 듯 합니다.
우선 드물게도 3년 임기 만료가 코앞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2년10개월25일)보다 깁니다. 역대 14명 원장 중에 임기를 다 채운 이는 윤증현(5대), 김종창(7대), 윤석헌(13대) 3명 뿐입니다. 천재지변이 생기지 않는 한, 15대 이 원장이 조만간 네 번째로 이름을 올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원장은 또한 비금융계 인사입니다. 12대 김기식 원장이 시민단체 출신이긴 하지만 임기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낙마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금감원 역사상 첫 비금융계 인사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레임덕이 없었던 금감원장으로도 이름을 남길 것 같습니다. 전임 원장들과 달리 임기 만료를 앞두고도 은행, 증권, 보험, 자산운용 등 업계 CEO들과 연이어 간담회를 진행하며 현안에 일일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권력의 원천인 대통령이 파면됐음에도 이 원장의 칼춤은 움츠러들 줄 모릅니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금융감독 수장 자리에 비금융계 인사가 임명돼 레임덕 없이 3년 임기를 다 채우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비금융계 인사지만 공인회계사 자격증과 미국변호사 자격증까지 가진 법조인이기에 스펙만 놓고 보면 행정고시를 패스한 고위 관료들에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금융비리 관련 수사 경험이 풍부한 ‘경제통’ 검사 출신입니다. 그렇다보니 비금융 이력이 핸디캡으로 작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레임덕 없이 3년 임기를 다 채운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부분은 ‘조직 장악력이 탁월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틀리면 ‘침대축구’를 구사할 수도 있는 관료사회 특성상 기관장이 기관을 장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수, 정치인 등 일부 ‘어공(어쩌다 공무원)’은 ‘늘공(늘 공무원)’ 공략에 성공하기도 합니다. 비법은 인사에 있습니다.
대선을 이기고 정권을 잡으면 ‘논공행상’이 진행됩니다. 대개 공약을 만든 이들이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장·차관 등 요직을 꿰찹니다. 그런데 공약이라는 게 유권자가 듣기엔 흐뭇하지만 실행해야 하는 늘공에겐 큰 걱정거립니다. 한정된 예산, 사회적 갈등, 풍선효과 등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점을 어공에게 어필해 설득이 되면 다행이지만 안 되면 고난의 가시밭길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반개혁적 인사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죠.
일부 늘공은 어공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차곡차곡 쌓아온 평판과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공은 그렇게 생긴 빈 자리를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인사로 채웁니다. 가끔은 늘공이 스크럼을 짜고 저항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어공은 ‘상식 파괴 인사’로 대응합니다. 누가 봐도 깜이 안 되는 인물을 발탁해 승진시키는 ‘충격요법’을 구사하는 것이죠. ‘당신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시키는 대로 이행이나 하라’는 경고 메시지입니다.
이복현 원장은 취임 전부터 금감원을 개혁의 대상으로 본 것 같습니다. 임기 내내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인사를 지속했습니다. 2022년 취임 직후 실시한 부서장 40명 교체 수시인사는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국실장급 부서장 전원을 사실상 1년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교체합니다. 업무를 파악할 만하면 다른 자리로 옮기는 일이 반복됩니다. 3년 내내 업무 파악만 하다 끝났다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습니다.
능력과 성과 중심의 인사관행을 정착시키겠다며 부국장보다도 낮은 팀장급 인사를 부서장(국실장급)으로 승진시키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렇게 초고속 승진된 부서장도 눈 밖에 나면 한순간 밀려나기 예사였습니다. 덕분에 작년 말 금감원 무보직 직원은 약 150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 원장이 마지막 정기인사에서 75명의 부서장 중 74명을 교체하면서 부서장들이 대거 보직 해임된 결과입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금감원 직원들에게 이 원장 재임 기간은 ‘긴장과 공포의 나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반세기 금감원 역사에서 조직이 이렇게까지 뿌리째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은행, 증권, 보험 등 분야별 짬짜미를 없애겠다며 예고 없는 ‘영역 파괴’ 물갈이 인사를 반복한 결과 이 원장 재임 3년 차에는 실·국장조차 비금융 출신 원장과 비슷한 수준의 업무 식견을 갖게 됐습니다. 이슈가 발생했을 때 해당 분야 책임자가 진단과 처방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연중 내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조직의 전문성과 안정성이 흔들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장 입장에선 일하기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이 싹 사라지면서 토 달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수행하는 조직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조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결과 이 원장은 금융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이 원장 취임 3년 만에 검찰의 상명하복 문화가 빠르게 정착됐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임기가 2주도 남지 않았는데 레임덕이 없는 비결’은 이와 같은 조직 장악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듯 합니다.
이 원장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금감원 조직 문화는 이 원장 퇴임 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닐 겁니다. 이 원장은 떠나면 그만입니다.
이 원장 재임 기간 동안 무리한 감독과 검사에 대해 금융업계 원성이 자자합니다. 우리금융이 대표적입니다. 전임 회장의 부당대출 사건이 터지자 ‘너 마침 잘 걸렸다’는 듯 정기검사 일정을 1년 앞당겼습니다. 해당 사건만 조사하면 될 일을 조직 전체를 탈탈 털겠다고 덤볐습니다. 검사 종료 5~6개월 후 결과를 발표하던 관례를 깨고 두 달여 만에 전격 발표하는 무리수도 둡니다. 정기검사의 결과물인 경영실태평가 등급 발표도 검사 종료 1년 뒤에 하던 관례를 무시하고 초고속으로 하향 발표합니다. 덕분에 우리금융이 사활을 건 동양·ABL생명 인수합병 과정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우리금융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증권, 보험 쪽에서도 책 한 권 분량의 스토리가 나올 판입니다.
여름철 아이들이 뛰어놀아 혼탁해진 계곡물은 다시 맑아지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오염이 심하면 제모습을 찾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정치권에선 권한 남용 등 금감원의 여러 문제에 대해 수술을 준비 중입니다. 조직개편 등 대대적 쇄신 작업을 준비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자업자득, 사필귀정이라고 하기엔 개운치 않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남은 이들만 전전긍긍할 모습이 너무 눈에 선해서겠지요.
아무리 좋은 개혁도 과정이 민주적이지 않으면 독재가 됩니다. 윤 전 대통령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이복현 원장은 금감원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습니다. 공감능력이 현격히 부족한 엘리트들이 자기확신에 경도되면 얼마나 무도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