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자료=연합뉴스)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일명 ‘삼성생명 포럼’을 개최한 지 약 한 달이 지났는데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한상 KAI 원장은 유배당 보험계약자를 위한 일탈 회계 해소, 자회사 삼성화재의 지분법 회계처리 두 가지를 공개 촉구했고, 삼성생명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금융감독원에 감리를 요청했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김남근·박홍배·이강일·이정문)은 지난 18일 ‘삼성생명 회계처리 논란 어떻게 풀 것인가’란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는 과연 이 논란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을까, 삼성전자 사업지원TF는 이 논란을 어떻게 보고했을까, 삼성생명은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걸까.

이번 논란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연결된 사안이기에 삼성생명 단독으로 대응하긴 어렵습니다. 그룹 차원의 결정과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삼성생명의 대처를 살펴봤을 때 삼성그룹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습니다. KAI의 권고를 따를 의무는 없으니 기존 회계처리 방식을 유지하면서 금감원과 정치권,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겠다는 입장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삼성그룹의 이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대응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소지가 다분해 보입니다. 삼성생명의 보고만 믿고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 사업지원TF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근거는 이렇습니다.

이번 논란은 이미 한국 국경을 벗어났습니다. IASB(국제회계기준위원회)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들어 유배당 보험상품의 씨가 말랐습니다만, 해외에선 지금도 유배당 상품을 판매하고, 비중도 상당합니다.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유배당 상품 비중은 절반이 넘고, 미국 시장도 감소 추세이긴 해도 여전히 30%대를 유지합니다. 이는 2023년 새로운 회계제도(IFRS17) 도입 이후 세계의 많은 보험사들이 이미 유배당 상품 회계처리에 이견 없이 표준(VFA, 변동수수료 접근법)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IASB는 새 회계제도가 시행된 2023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KAI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들 문제 없이 유배당 상품 회계처리를 하고 있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만 일탈을 적용하고 있느냐고. IASB가 마련한 국제회계기준(IFRS)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고쳐 나가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국 보험사들의 일탈회계 지속은 IFRS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한국(삼성생명)만의 특수한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니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집필해 달라는 주문까지 했다고 합니다.

IFRS17은 세계 최초의 통일된 보험회계 기준입니다. 국적과 상관없이 보험사 간 글로벌 비교가 가능하도록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정·보완 과정을 거쳐 완성됐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완성된 국제표준에 한국이 고춧가루를 마구 뿌려대는 격입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삼성생명이라는 회사 하나 때문에, 아니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회계 전체의 신뢰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점이 이번 문제의 본질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이 금감원을 구워삶는다 한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금감원은 IASB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감원이 다시 한번 삼성생명 편에 서서 일탈 회계를 용인할 경우 이번에는 IASB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분위깁니다. IASB는 이미 상황 파악을 마치고 이번 기회에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이라는 전언도 들립니다.

지난 18일 국회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손혁 계명대 교수는 이번 문제의 해결책으로 IASB 및 PWC 직접 문의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영국에 본사를 둔 PWC는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로, 삼성생명 외부감사인인 삼일회계법인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IASB가 PWC에 삼성생명의 일탈 회계에 대해 진상 파악을 요구할 경우 PWC는 삼일회계법인의 삼성생명 회계처리를 자세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삼일회계법인은 삼성그룹을 위해 ‘회계 도우미’를 자처할 수 있지만, PWC도 과연 그러할까요. 삼일회계법인의 납득하기 힘든 일탈 회계를 용인할 경우 PWC는 전 세계 수없이 많은 고객들과의 신뢰 훼손을 감수해야 합니다. 모르긴 해도 PWC는 삼일회계법인과 ‘헤어질 결심’을 할 지도 모릅니다. 한국이 IFRS 체제에 가입했다는 것은 이처럼 국제사회의 규율과 작동 매커니즘을 수용하겠다는 약속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료=경제민주주의21

금감원은 내일(21일) 이번 논란과 관련해 비공개 간담회를 개최합니다. 여당 주최 토론회에는 의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참했던 금감원이 자체적으로 별도 간담회를 비공개로 개최하는 것에 대해 시민단체(경제민주주의21)는 ‘비겁한 행태로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논평합니다.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KAI에 대해 ‘발언권 없는 배석만 허용’한 것에 대해선 금감원의 갑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간담회 참석자 명단을 제출해 달라는 국회의원실 요구도 거부했다고 하니 정권 초기 금감원의 위세가 대단해 보이는 것도 현실입니다.

뭔가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실상 이번 논란은 단순명료합니다. 신임 이찬진 원장은 우선 2023년 IFRS17 도입을 앞두고 2022년 12월 이복현 원장 당시 금감원이 일탈 회계를 허용한 배경과 과정을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 금감원 회계관리국과 보험리스크제도실 담당자들은 해당 내용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조직 보호와 책임 회피의 논리들을 헤집고 문제의 본질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복현 전 원장에게 당시 결정 과정을 직접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우의 수를 따져봐야 합니다. 계약자지분조정만 놓고 보면 ①일탈 회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 ②일탈 회계를 포기하고 보험부채로 인식하는 경우 ③일탈 회계를 포기하고 자본으로 인식하는 경우 등 크게 3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금감원과 삼성생명은 ①을 원하겠지만 실행할 경우 IASB가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큽니다. 가을 국정감사에서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겠지요. 69개국 중 60위인 우리나라의 회계투명성 순위는 더 떨어질 것입니다.

②를 선택하면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것이어서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삼성그룹으로선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의 매각 계획을 밝혀야 해 골치가 아플 순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대안(차선책)을 마련해 뒀을테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령의 유배당 보험계약자들에게 약속을 지키는 것이어서 사회정의에도 부합해 보입니다.

③을 선택하면 삼성그룹은 욕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보험계약자의 보험료로 거둔 천문학적인 이익을 독식하겠다고 공표하는 것인 만큼 사회적 비난과 지탄을 감수해야 합니다. 보험계약자들과 정치권이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겠지요. 소송전이 난무할 것입니다.

사실 가장 원만한 해결책은 삼성그룹 콘트롤타워인 삼성전자 사업지원TF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이재용 회장을 설득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의 매각 계획을 그룹 차원에서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지인지, 실수인지, 계획인지 그렇게 하지 않고 때를 놓쳤습니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더 잃기 전에 지금이라도 일탈 회계의 복귀 방침을 밝히는 게 바람직하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은 ‘무작정 버티기’에 돌입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번 사안은 이찬진 원장뿐만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조차 ‘어쩔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삼성그룹 편을 들었다간 대한민국 회계 전체의 신뢰도가 추락하게 생겼습니다. ‘코스피 5000’은커녕 ‘코스피 500’ 시대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삼성그룹이 ‘내 맘대로 회계’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금감원을 구워삶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 사안을 취재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누가 봐도 몰지각하고 비양심적인 행태인데 삼성생명은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유배당 보험계약자의 권익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일까. 취재의 한계로 여전히 의문 속에 갇혀 있지만 보험업계 한 관계자의 말에서 이해의 단초를 찾을 수는 있었습니다.

“삼성생명 회계팀의 KPI(핵심성과지표)가 뭐겠어요? 계약자지분조정 유지 아니겠어요? 가만히 있으면 총수 일가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인데, 어떤 직원이 계약자한테 배당으로 돌려주자고 먼저 나설 수 있을까요. 자기 KPI 깎여가면서…. 생명의 전자 지분 문제는 수혜자인 이재용 회장의 결단 없이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자료=경제민주주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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