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Viewers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저는 한차원 더 높게 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할 것입니다."

지난 2020년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현 회장)은 대국민 사과에서 무노조 경영과 경영권 승계 포기를 선언하면서, 사업적으로는 위와 같이 밝혔다. 핵심은 기술 중심의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도전하는 '뉴삼성'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뉴삼성' 프로젝트는 이미 대국민 사과를 하기 5여년전인 2014~201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삼성은 사업성과가 우수했던 화학과 방산을 롯데와 한화에 매각했다. 그룹의 역량을 집중해도 글로벌 1위가 되기는 힘들겠다는 점, 국내 경쟁이 심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해당 산업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곳에 판 것이다. 대신 삼성이 잘 할 수 있는 미래 성장동력에 집중하기로 했고, 그것이 바이오와 시스템반도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 최단 기간 세계 최고…바이오 투자의 성과

바이오 사업은 삼성이 공들이는 미래 먹거리다. 고 이건희 회장도 쓰러지기 전 거론해 온 육성사업이다. 고 이 회장은 지난 2010년 5대 신수종 사업 중 하나로 바이오를 꼽았으며, 202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듬해 2월 삼성은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CMO)과 바이오시밀러(의약품 복제약)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재용 회장 역시 바이오를 뉴삼성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2018년 이 회장은 성장동력 중 하나로 바이오를 꼽으며 거액의 투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본격적으로 그룹 주요 사업 중 하나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의약품위탁생산(CMO) 사업을 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24년 매출 3조 4971억원, 영업이익 1조3214억원을 기록했다. 2015년 1051억원에서 30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영업이익은 흑자전환한 2017년 660억원에 비해 20배 수준이다.

바이오시밀러 개발 부문을 맡은 삼성바이오에피스 역시 지난 2023년 매출 1조 클럽에 가입했다. 영업이익 역시 2019년 흑자로 돌아선 후 현재 2000억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바이오산업에 대한 삼성의 강한 의지와 적극적인 투자로 인한 결과라는 평가다. 이를 증명하듯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오는 4월 제5공장을 완공하면서 생산능력을 78만4000ℓ로 늘리게 된다. 압도적인 글로벌 1위 생산능력이다. 특히 CMO의 경우 수주가 증설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이같은 증설은 실적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 선택은 좋았는데…결국 관건은 '비메모리'

윤석열 대통령은 23일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반도체 산업에 26조원 규모를 지원하는 반도체산업종합지원방안을 논의했다고 대통령실이 전했다. 사진은 23일 오후 공사가 진행 중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반도체클러스터 부지 (사진=연합)


삼성이 바이오와 함께 또다른 먹거리로 삼은 것은 뜻밖에도 반도체다. 당시 반도체는 한국의 핵심 산업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기업이 삼성이었다. 즉 반도체 강국으로 불리는 한국, 그 중심에 삼성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반도체를 내세운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것을 더 키운다가 아니라 부족한 것을 메운다는 의미로 '반도체'를 성장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로 분류된다. 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는 D램, 낸드플래시 등을 뜻한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약 30%를 차지하는 분야다.

반대로 나머지 7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연산·논리 작업 등 정보처리를 담당한다.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컴퓨터용 중앙처리장치(CPU) 등이 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글로벌 1위다. 하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경쟁사인 TSMC에 크게 밀린다. 반도체가 강점인 삼성이라지만, 반도체 시장의 마이너리그에서 1위였던 셈이다.

이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2019년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에 총 133조원을 투자해 글로벌 1위에 오른다는 계획이다. 핵심은 비메모리에서도 1위를 하겠다는 것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 대비 부가가치가 크고, 상대적으로 가격 변동성이 낮다. 즉 삼성은 비메모리에서도 강자가 돼 메모리 사업의 불안정성을 보완하면서 삼성, 나아가 한국이 진정한 반도체 주도권을 쥐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삼성의 전략이 먹혔다. 비전을 선포한 지 1년 후인 2020년 1분기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 역대 최대 매출(4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비메모리 글로벌 1위라는 벽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두터운 상황이다. 여전히 비메모리 분야에서 인텔과 TSMC와의 격차를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삼성이 비메모리에 대한 사업진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지구에서 최고라고 불리던 메모리 역시 HBM으로 대표되는 AI 반도체 분야의 오판으로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뉴삼성'이 바이오와 비메모리를 선택했을 당시 다수의 전문가와 여론은 90점 이상을 줬다. 인류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그리고 국가와 기업적인 면에서도 적합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메모리 불황, 삼성의 오판(HBM 관련), 그리고 혼탁한 국내외 정세 등이 엮이면서 점수를 줄 경우 잘 줘야 50점 정도가 많다.

Y대 한 교수는 "바이오에서 삼성이 이룬 것을 무시하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국 삼성은 반도체가 핵심"이라며 "이재용 회장의 선택을 평가할 때 비메모리 반도체의 성패를 가장 먼저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이 회장의 뉴삼성이, 지금 위기 속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삼성그룹이 다시 '기회 DNA'를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반도체 사업에서의 반등, 또는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