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Viewers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 두 번째)이 중국 텐진에 위치한 삼성전기 사업장을 방문해 MLCC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
# 2014년 하반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실장(현 부회장)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상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현 회장). 이 부회장은 김 실장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넨다.
이 통화는 몇 개월 후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하는 빅딜로 이어진다. 삼성그룹의 방산과 화학 계열사를 한화에 매각하는 딜이 성사된 것이다. 2조원 규모의 이 딜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최대 규모였다.
시장에서는 갑작스러웠을지 몰라도 이재용 회장에게 방산과 화학 매각은 수년간 고민하고 준비해 온 일이었다. 2008년 이 회장은 계열사 고위 임원에게 "삼성에는 삼성'전자'와 '후자'가 있다는 소문 들으셨죠?"라고 물어본다. 해당 임원이 들어봤다고 하자 이 회장은 화학 계열사를 매각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의 화학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였기에 해당 임원은 의아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이 회장은 세계 최대 화학업체인 바스프를 거론하며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도 바스프를 이기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니, 차라리 그 힘을 1위 가능성이 있는 전자와 IT에 집중하자"고 설득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회장은 10년에 가까운 시간 전부터 고민과 함께 전문경영인들과 토론을 거쳤고, 부친에게도 쓰러지기 전에 이미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당시 취재 기록, 관련 업계 인사들의 전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
■ '방산·화학' 매각으로 시작한 '뉴삼성'…선택과 집중의 10년
삼성과 한화의 빅딜은 삼성 입장에서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창업기', 2대 이건희 회장의 '도약기'에 이어 3대 이재용 회장이 이끄는 '뉴삼성'의 시작을 알리는 M&A로 평가받는다.
10여년 전인 2014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와병으로 시작된 이재용 회장의 뉴삼성이다. 키워드는 '실용성'과 '선택·집중'이 대표적이다. 이는 의전을 멀리 하는 등 평소 소탈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재용 회장의 성격, 그리고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 잘 하는 부분에 더 집중해 최고가 돼야 한다는 철학이 맞물린 것으로 파악된다.
한화, 롯데에 방산과 화학 계열사를 매각한 것은 이같은 뉴삼성의 시작점인 동시에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경영활동으로 꼽힌다. 삼성은 2014년 11월 한화그룹에 석유화학 및 방산부분을 팔았고, 2015년 하반기에는 삼성SDI 케미칼 사업부와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을 롯데그룹에 매각했다.
이 회장은 당시 "한국 산업 구조는 중복이라 위험하다"며 "좁은 땅덩어리에서 같은 업종끼리 경쟁하면 어떻게 중국 경쟁 업체를 이기겠나"고 진단했다. 이어 "글로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비주력 계열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 10년전 경영판단 평가는 진행중…키워드는 '반도체'
이 회장과 삼성은 비주력 계열사를 파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선택한 사업, 즉 전자와 IT,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이 되는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이어 왔다. 2014~2015년 인수한 '스마트싱스'와 '루프페이' 등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2016년에는 미국 전장기업 하만을 80억달러에 인수한 것은 당시 한국 M&A 역사상 최대 규모로 꼽히기도 했다.
하만 인수는 삼성이 보유한 강점을 토대로 시장과 고객사를 늘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만 인수 후 삼성전자는 전장사업팀을 새로 꾸리면서 자동차 전장부품사업을 새 먹거리로 내세웠다.
삼성이 생산하는 반도체와 소재를 사용하는 부품업체를 인수해 여기에 납품을 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라는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확보한 것이다. 특히 하만은 세계 대부분의 완성차 업체를 고객사로 가지고 있는 부품업체라는 점에서 미래 한 축을 만든 성공적 M&A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 회장의 '선택과 집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스템반도체' 부문은 아직 물음표다. 이 회장 체제하에서 삼성은 반도체, 그것도 비메모리 부문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해오고 있다.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세계 최고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추격자 이상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투자와 공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인텔, TSMC 등 해당 분야 1위들의 벽은 높고 두껍다.
최근 삼성은 AI반도체 부문에서의 실기, 시스템반도체 부문의 정체 등으로 '위기설'이 커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10여년전 선택이 맞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하지만 언제든 트레이드에 대한 평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업계 전문가들은 10년전 빅딜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 회장의 뉴삼성에 대한 평가는 역시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라도 '사법 리스크'로 인해 언젠가부터 멈춰버린 '적극적인 M&A' '사업구조 재편 작업' 등을 발빠르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