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에 쌓여있는 철강제품(사진=연합뉴스)
2025년 국내 철강산업은 단순한 불황의 해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고율 관세가 유럽과 북미 전반으로 확산되며 더 이상 가격과 물량 조정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외교와 통상에서 비롯된 보호무역 기조가 산업 실적과 구조를 직접 흔들 수 있음을 증명한 한 해였다.
■ 美 50% 관세 직격…대미 수출 16% 감소
올해 3월 미국이 철강 품목에 50% 관세를 부과한 이후 국내 철강업계의 대미 수출은 즉각 위축됐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업계에 따르면 관세 부과 이후 9월까지 대미 철강 수출은 전년 대비 약 16% 감소했다. 연말까지 업계가 부담해야 할 관세 규모는 4000억원대로 추산된다.
국내 철강업계의 또 다른 핵심 시장인 유럽연합(EU)도 보호무역 대열에 합류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0월 철강 무관세 쿼터(TRQ)를 기존 3053만톤에서 1870만톤으로 47% 축소하고, 쿼터 초과 물량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50%로 상향하는 방침을 밝혔다.
정확한 적용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기존 세이프가드 종료 이후인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국은 지난해 EU에만 약 393만톤의 철강 제품을 수출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장에서 동시에 관세 장벽이 높아질 경우 국내 철강업계는 수출 구조 전반에 구조적 압박을 받게 된다.
■ 멕시코·캐나다까지 확산…북미 전반 ‘관세 장벽’
보호무역의 파장은 북미 전반으로 확산됐다. 멕시코 의회는 한국과 중국 등 자유무역협정(FTA) 미체결국을 대상으로 최대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최종 승인했다. 해당 법안은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관세 대상은 자동차 부품, 철강·알루미늄, 기계, 가전 등 1400여 개 품목에 달한다. 정부는 철강 슬래브 등 일부 품목이 제외돼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동차·전자 등 철강 수요 산업 전반에 대한 간접 충격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캐나다도 오는 26일부터 한국을 포함한 FTA 체결국에 대한 철강 저율관세할당(TRQ) 기준을 기존 100%에서 75%로 축소하고 철강 파생상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 경우 한국은 지난해 캐나다 수출 물량의 25%에 대해 추가 관세 부담을 지게 된다. 오일샌드용 강관 등 특정 품목은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 흑자 유지했지만…‘버티기 전략’의 한계
이 같은 악재 속에서도 주요 철강사들은 3분기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했다. 포스코홀딩스는 3분기 매출 17조2610억원, 영업이익 6388억원을 기록했다. 철강 판매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가동률 회복과 원가 절감이 수익성 방어에 기여했다.
현대제철은 3분기 매출 5조7344억원, 영업이익 932억원으로 전년 대비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다. 고부가 강판과 성장 산업용 제품 판매 확대가 영향을 미쳤다. 동국제강도 수출 인증 확대와 판매 다변화를 통해 영업이익 증가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실적은 구조적 경쟁력 회복보다는 ‘방어의 결과’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관세 부담이 고착화될 경우 기존 수출 중심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 현지 생산으로 방향 전환…조직·인사도 재정비
보호무역 기조 속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수출 전략을 유지하는 대신 현지 생산 거점 확보로 방향을 틀었다. 현대제철은 올해 3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연산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일관 제철소를 2029년 완공 목표로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총 투자액은 8조5000억원 규모로 현대제철·현대자동차·기아·포스코가 공동 투자하는 구조다.
포스코는 미국 2위 철강사 클리블랜드 클리프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100% 출자 특수목적법인(SPC) ‘포스-루이지애나’를 통해 현대제철 제철소에 투자하는 투트랙 전략을 가동했다.
2025년은 철강사들의 조직과 인사에서도 변화가 두드러진 해였다. 포스코는 해외 투자와 글로벌 사업을 전담하는 전략투자 조직을 강화하고 인도·미국 등 주요 거점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정비했다. 동국제강그룹은 글로벌 영업 기능을 별도 조직으로 분리했고, 세아그룹은 정기 인사에서 해외 사업 경험이 풍부한 인물을 전면에 배치했다. 현대제철은 30년 경력의 철강 전문가를 대표이사로 선임하며 위기 대응에 방점을 찍었다.
■ ‘얼마나 버티나’에서 ‘어떻게 살아남나’로
미국에서 시작된 고율 관세는 유럽과 북미 전반으로 확산되며 국내 철강업계의 기존 사업 모델을 흔들었다.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운 보호무역 환경 속에서 비용 절감과 물량 조정만으로는 불황을 넘기기 어렵다는 인식이 분명해졌다.
2025년은 철강업계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떤 구조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