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오늘부터 본격 시행된다 (사진=연합뉴스)
# '은행 창구 등 판매업자는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 상품을 권유해선 안 된다.'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에 명시된 ‘상품 숙지 의무’다.
하지만 금융권 현장에서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해가 부족한’ 수준으로 어디까지 봐야 할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법을 위반해 수억원의 과태료를 물 수 있는 만큼 시중은행들은 일부 금융상품 가입과 서비스 중단을 공지했다.
# 금소법에 따라 소비자는 보증보험이나 연계대출 등 일부를 제외한 보험·대출상품과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고난도 투자일임계약, 일부 신탁계약 등의 투자상품에 대해 일정 기간 내에는 자유롭게 계약을 철회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보험상품은 보험증권을 받은 날부터 15일 또는 청약일로부터 30일 중 빠른 날, 투자상품과 대출상품은 계약체결일로부터 각각 7일, 14일 이내에 청약을 철회하면 된다.
증권사나 보험사들은 ‘청약 철회권’과 ‘위법계약 해지권’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제시돼야 된다고 지적한다. 초기 투자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 '청약 철회권'을 행사하면 누구에게 손실이 전가되는지가 분명치 않다. 책임 여부가 따로 정리되지 않아 펀드를 판매한 증권사로서는 청약 철회가 가능한 기간까지 펀드를 설정하지 않고 놔둘 수 밖에 없다.
투자해야할 타이밍을 놓칠 수 있는 거다.
금소법 25일 본격 시행됐으나 금융 현장에서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세세한 부분에 대한 시행세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법이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근탁 키움증권 연구원은 “이번 금소법으로 인해 서비스 불편 초래와 함께 금융혁신이 퇴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란의 화살은 금융당국으로 향했다. 지난해 법 통과 이후 시행령과 규정 등을 명확히 마련하지 않은 당국의 안일함이 문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6개월 유예라는 카드로 논란을 잠재우려 했지만 금융사와 소비자의 불만은 점차 쌓이고 있다.
■ 은행, 비대면 상품 판매 줄줄이 중단
KB국민, 신한, 우리은행은 ‘스마트텔러머신(STM)’을 통한 입출금 통장 개설 서비스 등 비대면 상품 가입을 한시적으로 중단한다. NH농협은행도 펀드 일괄 포트폴리오 서비스와 연금저축펀드계좌의 비대면 신규 가입을 중단키로 했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보안 차원에서 중단이 됐지만 보완을 거쳐서 조만간 다시 비대면 가입 신청을 받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나은행은 인공지능(AI) 로보 어드바이저인 ‘하이로보’의 일반펀드·개인연금펀드의 신규·리밸런싱·진단거래를 오늘부터 5월 9일까지 중단키로 했다. 하이로보는 로봇이 맞춤 펀드를 추천해주는 시스템이다.
■ 명확한 기준 없어 금융사도 ‘골치’
삼성증권 관계자는 “현재는 직원 교육 및 녹음·녹취 인프라를 확실히 해놓은 상태”라며 “법에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증권사가 해놓을 수 있는 준비를 최대한 마쳤다”고 설명했다.
또 ‘위법계약 해지권’ 남발에 대한 우려도 높다. 불완전 판매 등 판매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소비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가, 펀드 등이 손실이 나면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등 악용 소지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법 조항을 보면 위법계약해지권이 적용됐을 때 금융사는 수수료 등 비용을 요구할 수 없다”며 “정기예금의 경우 해지하면 중도해지 이자율을 적용해야 할지, 아니면 약정 이자율로 보상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아 애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 수정·보완 요구에 개정안만 10여개
수정과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국회에서는 금소법에 대한 법률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발의된 개정안만 10여개에 달한다. 최근에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소법 개정안을 추가로 발의했다.
발의된 개정안은 대부분 책임을 더 강화하자는 게 주된 내용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최대 3배까지 강화하는 등 소비자의 권리를 강화하자는 내용이나 상품판매대리업자들의 책임을 강화하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례적으로 법 시행 전부터 개정안이 쏟아지자 수정하고 보완할 내용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서둘러 개정을 시행하면 더욱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또 일단 시행이 되고 구체적인 적용사례가 나온 이후 개정을 진행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금융당국은 금융권의 준비 부족과 적응 기간 등을 고려해 유예기간을 두겠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현장에서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체 시스템에 반영할 시간이 필요한 점을 감안해 일부 규정은 최대 6개월간 적용을 유예하기로 했다.
김은경 금감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은 “금융회사들과 꾸준히 소통해 애로 및 건의사항을 해결하겠다”며 “금소법이 금융소비자의 권익 증진뿐 아니라 금융사를 향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되는 만큼 시행에 앞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