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첫 고위 당정 협의회에 참석해 있다. 이날 여당에서는 이준석 대표와 권성동 원내대표, 한기호 사무총장, 성일종 정책위의장, 정부에서는 한덕수 국무총리와 추경호 경제부총리, 방문규 국무조정실장, 대통령실에서는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진복 정무수석, 최상목 경제수석이 참석했다. 2022.7.6(자료=연합뉴스)
“이번 정부는 최순실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 초기 관가에서 흘러나온 말입니다. 국정농단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데 진원지가 한두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국정농단 냄새를 맡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인사가 원칙대로, 상식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뭔가 다른 뒷배가 있다고 의심합니다. ‘이상한 인사’가 반복되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뀝니다.
‘이상한 인사’에서 ‘이상한’은 너무 주관적인 평가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무원들의 인사 정보는 촘촘하고 풍부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객관성이 담보되거든요. 근거는 대략 이렇습니다.
부처 공무원들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맡은 분야의 공약을 파악합니다. 여야 유력 후보의 공약은 더 꼼꼼히 파악하겠죠. 그리고 조직의 역량을 총동원해 선거 공약을 만든 이들과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듭니다. 경제, 교육, 외교·안보 등 핵심 분야의 경우 퇴직(OB) 선배가 이미 대선 캠프에 들어가 있어 작업이 훨씬 수월합니다. 특히 기획재정부는 캠프 정도가 아니라 정계에 진출한 국회의원 선배들이 많아 일의 전후, 역학 관계까지 훤히 꿰뚫을 수 있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보의 퍼즐은 부분적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대통령의 성향, 주변 핵심 인물들까지 모두 파악이 된 건 아니니까요. 나머지 조각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장·차관 인선, 대통령실 구성, 국무회의 등을 거치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공약이 국정과제로 확정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개진되고 조율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이 누구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지,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실세가 누구인지 공무원들은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아리송한 부분이 있으면 부처 간 정보교류를 통해 보강하면 됩니다. 교차검증까지 이뤄지니 신뢰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릅니다.
국정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는데 “최순실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공직 사회에서 흘러나왔다는 건, 국정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중에 열심히 의논해서 내린 결론이 주말을 거친 뒤 갑작스레 뒤집히고, 누가 봐도 적임자인 사람이 인사검증만 거치면 탈락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비선 실세’의 존재를 강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당시 의심의 시선은 김건희 여사 등 몇몇 인사들로 모아졌습니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에서 비선 실세는 스포츠 등 일부 영역에 국한됐지만 윤석열 정부의 경우 훨씬 광범위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루트로 국정에 개입하고 있는지 감조차 잡기 쉽지 않다는 불만이 공직 사회에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부처 서열 1위인 기재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물 만난 고기’처럼 희색이 만면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법조계에 몸담아 온 윤 전 대통령은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국정 2인자인 국무총리를 경제 전문가로 앉히려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한덕수 씨가 낙점된 배경입니다. 초대 경제부총리는 기재부 출신의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이, 대통령실 경제수석에는 서울대 법대 동문인 최상목 기재부 전 차관이 각각 기용됐습니다. 여기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김대기 기재부 OB가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한덕수(행시 8회)-김대기(22회)-추경호(25회)-최상목(29회)’ 기재부 4인방 라인이 윤석열 정부의 핵심 축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여기에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자리도 방문규(28회), 방기선(34회) 기재부 출신에게 돌아갔고, 조규홍(32회)·김완섭(36회) 등은 타 부처 장관 자리까지 꿰찼습니다. 항간에서 윤석열 정부를 검찰과 기재부의 공동정권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국정 핵심 요직을 이 정도로 꿰찼으면 국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의 많고 많은 기재부 출신 고위 공직자들 중에 윤 대통령에게 밉보여 잘렸다거나 스스로 직에서 물러났다는 이를 듣거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모른 척 눈을 감고 오히려 불의에 적극 동조하며 인사 등 실리만 챙겼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대통령실에서 근무했던 모 인사의 말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정부 출범 초기에는 검찰의 상명하복 문화에 적응이 안돼 애로가 많았다. 고집이 세고 화를 잘 내니까 다들 대통령을 어려워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겼다. 김건희 여사 문제 같은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당신 뜻대로 맞장구만 잘 쳐주면 오히려 상대하기 훨씬 쉬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때부터 공무원들이 역으로 대통령을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생겼다. 앞에서는 기분을 맞춰주고 뒤에서는 실리와 (정권의) 약점을 챙기더라.”
물론 잘 나가는 부처에 대한 타 부처의 시기, 질투 등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윤석열 정부의 단물은 기재부가 다 빨아먹었다’는 인식은 공직 사회에만 국한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야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의원은 최근 기재부를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쪼개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법안 발의자 명단에는 오 의원 외에도 10명의 민주당 의원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김동연 경기지사 역시 기재부 장관 출신임에도 지난 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기재부와 검찰을 해체 수준으로 개편하겠다”고 공언합니다.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대표가 당선될 경우 기재부 해체론은 더 힘을 받을 공산이 큽니다. 이 대표는 과거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 부처에 기획·예산·세제 등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최근에도 내수 진작을 위해 재정을 더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두고 재정 건전성을 우려하는 기재부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야권은 국회 의석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권을 잡으면 얼마든지 기재부를 해체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한덕수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을 지명해 공수처 고발을 자초했습니다. 오는 6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저울질하며 야당의 미움을 키우고 있기도 합니다. 작금의 기재부를 보며 ‘화무십일홍’을 떠올리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심정일까요.
국정농단의 ‘농단’은 한자로 ‘언덕 롱(壟)’ 자와 ‘가파를 단(斷)’ 자를 씁니다. 희롱한다는 의미의 ‘롱(弄)’ 자를 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언덕을 의미하며,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편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맹자는 제나라의 선왕에게 진언을 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아 제나라를 떠나려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선왕이 사람을 보내 부귀영화를 약속하며 만류하지만 맹자는 “진언이 채택되지도 않는데 농단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뿌리칩니다. 여기서 농단(높은 언덕)은 남을 물리칠 수 있는 나만의 유리한 지점, 즉 이익을 독점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도 않는데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부와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농단’이라는 단어의 정의라면, 국정농단은 박근혜 정부보다 윤석열 정부에서 훨씬 깊고 넓게 자행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