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 1층 한켠에 마련된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입구에 선대회장 생애가 담긴 입간판이 놓여있다(사진 좌). 전시장 초입구에 그의 소장품 일부와 함께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의 주된 업적을 간략히 소개되고 있다(사진 우).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 19일 오후 1시30분. 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 1층에 들어서자, 한켠에 마련된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입구에 위치한 입간판이 방문자들을 먼저 맞는다. 이 한장의 입간판에는 서 선대회장이 삶을 시작한 1924년부터 80년간 평생을 화장품산업과 녹차산업에 바치고, 삶이 마침표를 찍은 2003년 이후에는 그의 신념이 씨앗이 되어 아모레퍼시픽 근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제일 큰 회사는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회사를 만들고 싶다." 입간판 속 내용을 통해 전해진 서 선대회장 청년시절의 이 한마디 말은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시작이자 현재의 존재 이유가 '아름다움과 건강을 가꾸는 여정'임을 분명히했다. 이 때문인지 그룹은 1924년 7월14일 생일이었던 100주년을 맞아 지난 19일부터 한달간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 그의 꿈의 여정을 전하는 중이다. 이번 전시회는 선대회장을 회고하는 영상전시가 핵심이지만, 상영관을 중심으로 세 구역으로 나뉘어 창업주 생애를 만날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용한 그의 소장품.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내 서 선대회장의 소장품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됐다면, 이번 전시장에 담긴 소장품들은 '청년 서성환'이 신지식층으로써 당시 주변인이자 종속적 지위에 머물던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드러내 변화를 맞으라'고 몸으로 외치는 듯 했다. 박해숙 전 태평양 미용연구실 상무는 "(서 선대회장은) 여성들이 화장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주인공"이라며 "화장품을 회장님이 직접 관심 갖는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 ■"돈 벌어 좋은 일을 하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선대회장이 사용한 소장품.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이번 전시 메인인 회고 영상은 약 25분간 펼쳐졌다. 창업주 지척에서 시작부터 최소 20년 이상 함께한 이광호 전 해외사업 상무, 박문기 오설록 제주녹차사업 이사, 황혜숙 전 태평양화학 미용연구실 상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등 총 6인의 원로들이 아름다움을 향한 선대회장의 꿈과 담대한 도전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크게 ▲화장품 해외사업 ▲품질 개발 ▲녹차산업으로 나눠 창업주 일화와 정신을 공유했지만, 이야기의 끝은 사회적 책임으로 맞닿아 있었다. 박문기 오설록 제주녹차사업 이사는 "'(서 선대회장은) 불모지를 옥토로 만든 다음은 일꺼리(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돈 벌어 좋은 일을 하자'고 했다"며 기업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고자 했음을 강조했다. 실제 그가 1970년대 우리나라에 고유한 전통 차(茶) 문화가 없음을 안타까워해 '녹차산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척박한 제주도의 버려진 땅을 직접 골라 수년간 일궈냄으로써 현재의 아모레퍼시픽 녹차 브랜드로 키워냈다. 특히 이 같은 업적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한국의 차문화 계승 발전과 체계적인 복원, 대중화를 이뤄 국민건강 증진에까지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박 이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이 계획한 일은 지키도록 설득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 선대회장은 한국 화장품의 해외시장 진출 첫 물꼬를 튼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광호 전 해외사업 상무는 화장품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돈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열망을 전하며 "'사업을 하는 이상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며 '사람은 행복을 찾는데 나는 아름다움에서 찾겠다. 그런 회사를 만들겠다'고 늘 말했다"는 집념의 일화를 전했다. 서경배 회장은 국내 화장품업계 발전사를 주도하고 기틀을 마련했던 열정에 대해 회고했다. 서 회장은 "구조조정을 많이 해야만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증권업을 가장 먼저 팔았다"며 "화장품은 당시 사향사업이었기 때문에 사실 안팔았으면 했지만 (선대회장은) 주변의 반대에도 잘하던 것을 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금융, 서비스 등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태평양은 1982년 상호신용금고에 이어 동방증권을 인수했고, 이듬해에는 광고업으로도 사업을 확대했다. 의약품사업부를 독립시켜 태평양제약으로 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 발생한 파업은 태평양 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전환점으이 된다. 당시 모기업보다 덩치가 커진 자회사 태평양증권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룹 출발이자 뿌리인 화장품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머니였다"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세번째 구역에 놓여진 엽서들.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서 선대회장의 화장품 품질에 대한 고집도 엿볼 수 있었다. 오원식 아모레퍼시픽 2대 연구원장은 "당시 우리나라 화장품 연구는 초기 단계였다"며 "연구소가 있어야 화장품 발전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서 선대회장의 어머니가 손수 동백기름을 만들어 판 것이 시초였다. 서 회장에 따르면 선대회장의 화장품에 대한 시작은 32년 전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직원이 한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의 아들이었단 것이다. 서 선대회장이 화장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어머니로부터 받아든 첫 임무는 원료를 구하는 일. 어머니는 좋은 원료가 최고의 품질을 만든다는 믿음 하에 동백나무 씨를 얻기 위해선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품질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받은 서 선대회장은 1954년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개설했다. 서울 용산 후암동 공장 화장실을 개조해 만든 초라한 연구실이었지만 당시로선 선구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아모레퍼시픽은 "(서성환 선대회장은) 품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기술력, 혁신제품, 차별화된 광고와 절묘한 마케팅 전략으로 우리나라 뷰티문화를 이끌어왔다"며 "그가 던지는 메시지와 질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의 꿈과 세계'를 들여다볼 영감과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자가간다]' K-뷰티' 기틀 만든 서성환 아모레 창업주 100년 발자취

아모레퍼시픽, 19일~8월16일까지 영상 회고전 진행

전지현 기자 승인 2024.07.20 09:00 의견 0
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 1층 한켠에 마련된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입구에 선대회장 생애가 담긴 입간판이 놓여있다(사진 좌). 전시장 초입구에 그의 소장품 일부와 함께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의 주된 업적을 간략히 소개되고 있다(사진 우).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 19일 오후 1시30분. 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 1층에 들어서자, 한켠에 마련된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입구에 위치한 입간판이 방문자들을 먼저 맞는다. 이 한장의 입간판에는 서 선대회장이 삶을 시작한 1924년부터 80년간 평생을 화장품산업과 녹차산업에 바치고, 삶이 마침표를 찍은 2003년 이후에는 그의 신념이 씨앗이 되어 아모레퍼시픽 근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제일 큰 회사는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회사를 만들고 싶다."

입간판 속 내용을 통해 전해진 서 선대회장 청년시절의 이 한마디 말은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시작이자 현재의 존재 이유가 '아름다움과 건강을 가꾸는 여정'임을 분명히했다. 이 때문인지 그룹은 1924년 7월14일 생일이었던 100주년을 맞아 지난 19일부터 한달간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 그의 꿈의 여정을 전하는 중이다.

이번 전시회는 선대회장을 회고하는 영상전시가 핵심이지만, 상영관을 중심으로 세 구역으로 나뉘어 창업주 생애를 만날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용한 그의 소장품.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내 서 선대회장의 소장품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됐다면, 이번 전시장에 담긴 소장품들은 '청년 서성환'이 신지식층으로써 당시 주변인이자 종속적 지위에 머물던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드러내 변화를 맞으라'고 몸으로 외치는 듯 했다.

박해숙 전 태평양 미용연구실 상무는 "(서 선대회장은) 여성들이 화장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주인공"이라며 "화장품을 회장님이 직접 관심 갖는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

■"돈 벌어 좋은 일을 하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선대회장이 사용한 소장품.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이번 전시 메인인 회고 영상은 약 25분간 펼쳐졌다. 창업주 지척에서 시작부터 최소 20년 이상 함께한 이광호 전 해외사업 상무, 박문기 오설록 제주녹차사업 이사, 황혜숙 전 태평양화학 미용연구실 상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등 총 6인의 원로들이 아름다움을 향한 선대회장의 꿈과 담대한 도전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크게 ▲화장품 해외사업 ▲품질 개발 ▲녹차산업으로 나눠 창업주 일화와 정신을 공유했지만, 이야기의 끝은 사회적 책임으로 맞닿아 있었다. 박문기 오설록 제주녹차사업 이사는 "'(서 선대회장은) 불모지를 옥토로 만든 다음은 일꺼리(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돈 벌어 좋은 일을 하자'고 했다"며 기업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고자 했음을 강조했다.

실제 그가 1970년대 우리나라에 고유한 전통 차(茶) 문화가 없음을 안타까워해 '녹차산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척박한 제주도의 버려진 땅을 직접 골라 수년간 일궈냄으로써 현재의 아모레퍼시픽 녹차 브랜드로 키워냈다. 특히 이 같은 업적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한국의 차문화 계승 발전과 체계적인 복원, 대중화를 이뤄 국민건강 증진에까지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박 이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이 계획한 일은 지키도록 설득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 선대회장은 한국 화장품의 해외시장 진출 첫 물꼬를 튼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광호 전 해외사업 상무는 화장품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돈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열망을 전하며 "'사업을 하는 이상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며 '사람은 행복을 찾는데 나는 아름다움에서 찾겠다. 그런 회사를 만들겠다'고 늘 말했다"는 집념의 일화를 전했다.

서경배 회장은 국내 화장품업계 발전사를 주도하고 기틀을 마련했던 열정에 대해 회고했다. 서 회장은 "구조조정을 많이 해야만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증권업을 가장 먼저 팔았다"며 "화장품은 당시 사향사업이었기 때문에 사실 안팔았으면 했지만 (선대회장은) 주변의 반대에도 잘하던 것을 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금융, 서비스 등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태평양은 1982년 상호신용금고에 이어 동방증권을 인수했고, 이듬해에는 광고업으로도 사업을 확대했다. 의약품사업부를 독립시켜 태평양제약으로 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 발생한 파업은 태평양 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전환점으이 된다. 당시 모기업보다 덩치가 커진 자회사 태평양증권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룹 출발이자 뿌리인 화장품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머니였다"

'서성환 선대회장 탄생 100년 기념 영상 회고전' 세번째 구역에 놓여진 엽서들. 사진=전지현 뷰어스 기자.


서 선대회장의 화장품 품질에 대한 고집도 엿볼 수 있었다. 오원식 아모레퍼시픽 2대 연구원장은 "당시 우리나라 화장품 연구는 초기 단계였다"며 "연구소가 있어야 화장품 발전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서 선대회장의 어머니가 손수 동백기름을 만들어 판 것이 시초였다. 서 회장에 따르면 선대회장의 화장품에 대한 시작은 32년 전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직원이 한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의 아들이었단 것이다. 서 선대회장이 화장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어머니로부터 받아든 첫 임무는 원료를 구하는 일. 어머니는 좋은 원료가 최고의 품질을 만든다는 믿음 하에 동백나무 씨를 얻기 위해선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품질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받은 서 선대회장은 1954년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개설했다. 서울 용산 후암동 공장 화장실을 개조해 만든 초라한 연구실이었지만 당시로선 선구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아모레퍼시픽은 "(서성환 선대회장은) 품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기술력, 혁신제품, 차별화된 광고와 절묘한 마케팅 전략으로 우리나라 뷰티문화를 이끌어왔다"며 "그가 던지는 메시지와 질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의 꿈과 세계'를 들여다볼 영감과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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