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박해일(사진=CJ엔터테인먼트)
“그러면 안 돼요?”
드라마에 출연할 의사는 없냐고 물었더니 박해일은 오히려 반문한다. 맞는 말이다. 프로필, 사인에서도 드러났던 정직한 성향이 진지한 답변 하나하나에 묻어났다. 드라마를 하지 않는 이유가 아닌 여전히 영화에 매료돼 있기 때문이다.
“왜 영화만 하냐고 자주 물어보신다. 그게 의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안 돼요? 영화랑 드라마를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있듯 이런 스타일도 있는 거고. 하다 보니 작품 촬영 마치고 저를 비워내고 털어내는 시간대가 있다. 그러다 다행히 몇몇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거기서 흥미로운 지점을 찾게 되고 해보지 않았던 영화를 하고 있더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사람일이라는 게. 계획적으로 간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영화는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주체가 되기 쉬운 장르가 아니다.”
박해일이 지금껏 해온 캐릭터만 보더라도 그의 광활한 스펙트럼에 놀란다. ‘살인의 추억’의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도, ‘연애의 목적’의 능글능글한 유림도 박해일이고 ‘은교’의 늙은 소설가 이적요, ‘최종병기 활’의 신궁 남이도 박해일이다. 시나리오에 매료되면 역할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작품 선택 기준은 단순하다. 처음 받게 되는 건 시나리오 속 모습이다. 잘 읽히는 매력이 있고 저라는 사람이 그 책 안에 들어가 집중, 호기심이 생겨야 하고 이 호흡을 잘 버텨내고 해나갈 수 있는지가 첫 번째다. 기준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인거지 분량은 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신중하게 골랐을 작품인 ‘남한산성’은 의도치 않게 두 번이나 고사했던 영화다. 그럼에도 박해일은 ‘남한산성’을 결국 선택했다.
“제안을 받았을 때 물리적으로나 심적인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중하게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이후에 황동혁 감독에게 제가 왜 이 작품을 해야 하고 해줬으면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얘기를 듣고 결정했다. 이미 이병헌, 김윤석 선배가 캐스팅 된 상황이라서 ‘남한산성’이라는 버스에 탑승해 속도감 있게 준비를 했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남한산성’의 배경은 박해일에게 이미 익숙하다. 그가 출연했던 ‘최종병기 활’의 무대도 병자호란이었다. 당시엔 민초의 중심이었다면 ‘남한산성’에선 굴욕적 인물인 인조 역이었다. 그 시대를 다시 만나게 된 박해일은 김훈의 원작을 다시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최종병기 활’을 준비할 때 처음 읽었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읽었을 땐 간접적으로 ‘한번 보자’ 정도였다면 이번 작품에 참여하면서 읽었을 땐 살아감에 있어서 지금의 우리처럼 느끼는 부분이 생기더라.”
역사의 기록으로만 봤을 때 인조는 무능한 왕이자 나라의 굴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비호감도가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애정을 가지기도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박해일은 그 평가보단 그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데 집중했다.
“역사적 인물을 떠나서 제가 걸어온 길과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래서 낯설기도 하지만 역사적 평가가 있는 인물이라 갇히지 않게, 박제된 인물에 숨을 불어 넣으려 했다. 남한산성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 안에 공을 들였던 것 같다. 인조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서 김상헌(김윤석), 최명길(이병헌) 캐릭터가 역동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삼각구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집중하려 노력했다. 전 능동적 인물로 만들어내야 하는 목적이 있었다.”
■ “후배 입장에서 이런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박해일을 비롯해 ‘남한산성’은 김윤석, 이병헌,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첨예한 대립을 펼치는 최명길과 김상헌 사이에서 인조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배우로서 부담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병헌, 김윤석 선배는 한국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기회가 닿으면 작업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동시에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런 기회가 많이 없으므로 함께 화학작용도 일으켜보고 연기 외적으로 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일상을 관찰도 해보고 싶었다. 저도 나름의 무언가가 있지만 두 분의 기운들, 장점을 흡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리였다. 후배 입장에선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역사가 스포일러듯, 극 중 이조는 결국 최명길의 손을 들었다. ‘남한산성’의 미덕은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최명길과 김상헌의 첨예한 대립으로 관객들에게 마지막까지 고민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박해일 역시 답이 없는 문제에 선택은 관객들에게 돌렸다.
“이번 인터뷰에선 제 선택을 말 안하기로 했다. 오로지 관객들에게 넘기기 위해서다. 판단하고 생각하는 지점으로 만들어드리고 싶다. 그 지점을 마련해 줄수록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에 개입의 여지를 줄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