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영하 데뷔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 '주홍글씨' 스틸컷)
[뷰어스=문서영 기자] 작가들은 저마다 색깔과 개성이 뚜렷하다. 유명 작가일수록 저만의 분위기가 자리잡으며 고정 독자층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올챙이적’은 어떨까? 내로라하는 명성과 감탄이 나오는 필력을 갖추기 이전 데뷔작을 찾아 읽어보는 것은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에겐 또다른 즐거움이다. 같은 사람인 듯 다른 느낌을 전하는 작품들은 조금 엉성하고 도전적이고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데뷔 때부터 완벽해 감탄이 나오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유명 작가일수록 그들의 데뷔작은 특별하다. 수십년 단골집의 새로운 메뉴를 맛보는 느낌이랄까, 다 큰 자식의 어린 시절이 새삼스럽고 신기하달까. 그 맛이 참 쏠쏠하다.
(사진=플랫폼-엘)
■ 황석영, 19살 그 시절엔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난 황석영은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살, 무려 고교 재학 중일 때 쓴 단편 소설이다. 이후 그는 19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입석부근’은 조난당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통해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죽음과 싸우는 고통스러운 절벽 위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시련을 이겨내며 새롭게 변화해나가는 자신과 마주한다. 고교생이 썼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깊이가 남다른 작품이다. 지난해 장민승 작가가 영상 작품 ‘입석부근’으로 작가의 원작을 50년만에 영상작품으로 부활시켰다. 장 작가가 전율했다는 ‘입석부근’이 실린 ‘객지’는 절판돼 쉽게 접하기 어렵다. 청소년 독자를 상대로 엮은 단편집 ‘한빛문고15-아우를 위하여’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다. 19살 문학소년의 사유가 얼마나 깊은지 이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작업은 모험이 아니며, 산과 나를 합쳐지게 하려는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땅 위에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듯, 불만과 열등감과 자의식을 어두운 생활 속에 끌고 다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리적인 암벽작업에 정신을 불어넣고, 우리의 싱싱하고 자유스러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바위라고 가정해봤을 뿐이었다”
(사진=JTBC 방송화면)
■ 김훈, 운명과 유전과 문명
김훈에게 올해는 특별한 해였다. ‘남한산성’ 100쇄 기념 특별판이 출간됐고 이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긴 동명의 영화도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사회적 현안에도 남다른 목소리를 내는 김훈의 데뷔작은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이다. 기자 출신인 그가 작가로서 첫 신고식을 치른 작품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문명에 지배당하는 한 소방관과 신석기 여인으로 비유된 장님 안마사의 죽음을 통해 문명을 지배하지 못하고 이끌려 다니는 현대인들의 고뇌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유전됨’을 느끼는 순간 몸서리치는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됐지만 품절 상태로 도서관 대여나 중고 도서로 구할 수 있다.
(사진='토끼와 잠수함' 책표지)
■ 박범신, 날 때부터 탐미적이었나?
‘은교’의 박범신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문학이란 “목매달고 죽어도 좋은 나무”라 말하는 박범신은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여름의 잔해’는 가학적인 성격의 오빠와, 그런 오빠를 혐오하는 언니를 바라보는 여동생 시점에서 쓰여졌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쌍둥이 남매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의 이면을 반추하며 예술성과 생명이라는 가치의 대립, 죽음안에 공존하는 생명 등 인간내면의 미묘한 심리를 오간다. 독자들은 ‘여름의 잔해’에 펼쳐진 그의 감각적 묘사에 박수를 보냈다. ‘박범신 중단편전집 1: 토끼와 잠수함’에 실려 있다.
(사진='호출' 책표지)
■ 김영하, 문학 초년생 땐
김영하는 말이 필요없는 작가다. 올해 tvN ‘알쓸신잡’에 출연하며 화제가 된 데 이어 ‘살인자의 기억법’이 영화화되면서 단연 최고 이슈가 된 작가다. 그의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죽음의 미학을 매혹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함으로써 한국문학에 비범하고 충격적 소설가의 탄생을 알린 작품으로 꼽힌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김영하의 첫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공식적 첫 작품은 1995년 계간지 ‘리뷰’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故이은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주홍글씨’의 원작이기도 하다. 결혼을 앞둔 한 남자와 남자의 여자 친구가 한강변을 걷다 섹스를 하기 위해 버려진 폐차의 트렁크에 들어갔다 갇혀 죽는다는 내용이다. 중앙일보는 1995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이 작품을 낙선 시켰다. ‘후반부 무게에 비해 전반부 성애가 너무 가볍고 진해’ 새해 첫날에 도저히 내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부 독자들은 김영하의 진짜 데뷔작은 ‘알쓸신잡’에서도 등장했던 ‘무협학생운동’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거울에 대한 명상’은 그의 단편소설집 ‘호출’에 실려 있다.
(사진='유쾌한 하녀 마리사' 책표지)
■ 천명관의 남다름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각본, ‘고령화 가족’ 원작자이기도 한 천명관은 ‘이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그는 단편 ‘프랭크와 나’가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프랭크와 나’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백수 남편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사촌 프랭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과 부딪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의 아이러니가 유쾌하게 그려진다. ‘고래’로 문단에 충격을 전하고 수많은 문학인, 문화인들이 꼽는 수작으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소시민, 현재, 허망한 희망, 허무 등을 담아낸 ‘프랭크와 나’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