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뷰어스=문서영 기자] 요즘 서점가에 꽂힌 책들의 태반은 작가가 아닌 이들의 저서가 자리하고 있다. 독자들의 호응도도 높다. 이전까지 작가가 아닌 이들이 책을 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과시였다. 정치인의 자서전, 성공신화를 일군 기업인의 자전적 에세이나 노하우, 충격적 사건의 주인공이 펴내는 사건의 전말….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의사가 소설을 쓰고 판사가 에세이를 쓰는 시대다. 사회학자는 연구를 하다 주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소설을 내기도 한다. 이런 책들에 대한 호응도 남다르다.
이에 대해 한 출판 관계자는 “요즘 독자들은 효율적인 책읽기를 선호한다”면서 “이런 점에서 재미도 있으면서 정확하고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전문직업군의 책은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지식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작가가 아닌 이들의 책이 인기있는 이유에 속한다”면서 “특히 전문 작가가 몇 개월, 혹은 몇 년간 어떤 직업을 취재해 써내는 작품보다 해당 직군에 속한 이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사실적이며 재밌다”고 설명했다.
재미와 정보, 감동까지 더해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책은 출판계도, 독자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사회학자, 검사, 정신과 의사 등 다양한 직군의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 혹은 주변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출간한다. 직업적 메시지는 물론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선도 읽는 이들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진=관련 책표지)
■ 사회를 향한 그들의 시선
‘개인주의자 선언’(문유석 | 문학동네)은 현직판사 문유석의 신문 기고글을 모은 책이다. 현직판사가 교육, 사건, 제도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개인주의란 이기주의와 달리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유교사상, 군대 등 끈끈한 집단 문화에 얽매어 이 개인주의마저도 이기주의, 배타주의로 여겨진다고 일침한다. 그는 故 신해철을 개인주의자로 생각한 이유를 비롯해 자기계발 신화에 중독된 사회, 이주 노동자나 다문화 가족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 사람들이 SNS에 글을 쓰는 이유, 흉기가 되는 말 등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면면들에 대해 솔직하고 가감없는 감정들을 드러낸다.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안경희 | 새움)는 조울병으로 ‘사회적 자살’에 이르렀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다. 저자는 대학병원 인턴을 거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중 조울병이 발병, 우울증에 떠밀려 사표를 내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이후 병을 인지하고 치료를 받았으며, ‘마음의 병이 아닌 몸의 병’인 조울병의 실체를 알리고 남모르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살려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경험자이자 치료자로서 조울병에 대한 지식을 알기 쉽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한 따뜻하고 지혜로운 목소리를 함께 담았다.
(사진=관련 책표지)
■ 직업의 깊이란 … 종사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지독한 하루’(남궁인 | 문학동네)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만약은 없다’에 이어 남궁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다. 한때 죽으려 했지만 곧 제 손으로 죽음을 받아내기도 놓치기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남궁인이다.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이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을 이 책에 담았다. 막연히 상상했던 TV 속 의학다큐, 응급실 24시간 같은 이미지는 완벽한 착각이다. 거기엔 십수년간 글만 써온 전문작가가 담아낼 수 없는 현장의 숨결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존재한다. 환자나 보호자가 아닌 의사는 제 3자이지만 결코 3자일 수 없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병원에서 처음 만난 환자의 생사에 관여하는 이 젊은 의사는 생을 붙잡고, 생을 놓치는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고 곱씹는다. 더불어 그와 같은 응급의학과 의사들을 만나지 않고 살이있음이, 평화로운 하루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검사내전’(김웅 | 부키)은 2000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래 18년간 검사 일을 해오며 스스로를 ‘생활형 검사’라고 지칭하는 김웅이 검찰 안에서 경험한 이야기가 담겼다. 김웅이란 사람이 검사라는 직업 덕분에 알게 된 세상살이, 사람살이를 둘러싼 속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끊임없이 거짓과 싸워야 하는 검사 일을 하다 보니 한때는 사람 말을 믿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만나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지만 다른 인생의 찢어진 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꿰매주어야 할 때가 많기에 다시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건 피의자들과 피해자들을 만나며, 범죄 자체가 내뿜는 악에 집중하기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과 그로 인해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저자는 자신이 비록 죄를 다루는 검사라 하더라도 세상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요즘처럼 판·검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때에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사진=관련 책표지)
■ 소설도 쓴다고?
‘다시, 빛 속으로-김사량을 찾아서’(송호근 | 나남)는 사회학자인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해 4월 첫 장편 ‘강화도’를 낸 데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한 장편소설. 일제강점기, 굴곡의 역사를 통과한 작가 김사량(金史良·1914~1950)의 삶을 그렸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민족 정체성 형성을 연구하다 논리로 따지면 이념 장벽에 부딪히니 상상의 공간에서 해결하자는 욕심에서 김사량을 떠올리게 됐다고. 김사량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반일 투쟁으로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고 25세에 쓴 소설 ‘빛 속으로’로 일본 아쿠타가와(芥川)상 후보에 올랐으나 ‘반도인’이란 이유로 수상하지 못한 인물. 광복 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종군작가로 참전한 그를 통해 저자는 ‘정체성’ ‘민족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든다.
‘내 마음, 새로 태어나고 싶다면’(홍순범 | 글항아리)은 홍순범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의 심리치료 소설이다. 갓 의사가 됐을 때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인턴일기’를 썼던 저자는 이번에는 심리치료 과정을 소설로 담아냈다. 3년간 백수인 취준생 주인공은 중상위권, 여자 친구도 있고, 가정에도 큰 문제 없는 평범한 청년이다. 하지만 취직도, 삶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삶을 마감하겠다며 한강 다리 난간에 선다. 그때 난간에 붙은 메모가 보인다. 생각연구소, 감정수련원, 행동체육관. 한 번 만나본다고 손해날 건 없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죽음을 잠깐 보류하고 그곳을 찾아간다. 소설로 심리치료를 하겠다는 생각을 전문작가가 할 수 있을까.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기에 저자는 더욱 내밀하고 심도깊은 이야기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