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혁(사진=FNC엔터테인먼트 제공)
[뷰어스=이소연 기자] ‘연기를 한다’와 ‘캐릭터가 된다’는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얼핏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연기는 시나리오에 맞춰 설정된 인물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배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진짜처럼 만들어내고, 허상의 것을 실체로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배우가 진짜 그 인물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연기가 아니게 된다. 배우가 캐릭터가 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동과 말들을 내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이 한 장의 간극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배우 성혁이 tvN 드라마 ‘화유기’에서 보여준 건 연기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며 동장군과 하선녀에 부여한 생명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1인 2역의 비결’을 물어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일 뿐이니 말이다.
“한 50%는 잘 끝마친 것 같아요. 겸손 떠는 건 아니에요. 연기 중 잘했다고 생각한 부분들도 있어요. 시청자들이 보면서 ‘노력했구나’ 알아주는 부분들이요. 나도 그간 캐릭터를 준비한 과정이 있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준비했는데 연기가 왜 이럴까’ 생각하는 순간 무너진다고 생각해요. 예쁘다는 소리 들었으니까 됐죠, 뭐. (웃음) 평생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겠어요?”
성혁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지도, 잘난 척을 하지도 않았다. 또 자신이 해온 노력도, 시청자들의 반응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자신의 장면을 받아들였다.
성혁(사진=tvN 제공)
■ 여장해서가 아니라, 하선녀라 예뻤다
극중 성혁은 손오공의 벗인 동장군 역할을 맡았다. 차분하고 우직한 성품은 판타지 드라마 특성상 들뜨는 부분을 묵직하게 눌러줬다. 또 하나의 역할은 동장군의 동생 하선녀다. 하선녀는 이미 죽었지만 영혼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는 동장군의 소원으로 인해 동장군의 육체를 빌리게 됐다. 몸은 한 개인데 영혼은 두 개인 셈. 즉 성혁은 성별의 간극을 뛰어넘은 1인2역을 펼쳤다.
“처음 여장을 하고 거울을 봤을 때 꼴 뵈기 싫었는데 점차 인물을 찾아나갔죠. (웃음) 긴 머리를 짧게 자르기만 해도 어색한데 여장을 했으니 얼마나 어색했겠어요. 이건 더 하자, 이건 좀 빼자 조율하면서 어색함을 줄여나가자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 예쁜데?’ 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셀카도 한 번 찍어볼까 싶고. 하하”
주변 여자 배우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며 예쁨을 독차지(?)한 성혁이다. 심지어 댓글로 ‘설현 닮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는 언행뿐만 아니라 비춰지는 모습도 부자연스럽지 않도록 ‘어떤 쪽 얼굴이 더 여성스러워 보일까, 어떤 표정을 써야 남성성이 묻어날까’ 고민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식의 주문도 있었지만, 제작진이 나에게 많이 맡겨주셨어요. 너의 방식대로 표현하라는 말이 힘이 됐죠. 하선녀뿐만 아니라 동장군도 많이 신경 썼어요. 묶은 머리가 상투 같잖아요? ‘화유기’가 현대물에 판타지이지만, 사극적인 느낌도 가져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동장군이라는 인물의 톤앤매너를 나름 유지하는 거죠”
성혁(사진=FNC엔터테인먼트 제공)
아무래도 파격적인 여장과 1인2역 덕에 하선녀가 더 주목을 받았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혁에게는 두 인물 모두 소중하다. 동장군도, 하선녀도 성혁은 그에 맞는 옷을 입는 순간 자연스럽게 몰입했다.
“동장군은 묵직하고 호흡이 많아요. 하선녀는 묵직이라기보다 여유가 있지만, 그러면서도 하이톤인 것들이 있죠. 남자인 내가 뿜어낼 수 있는 최대의 하이텐션을 썼어요. 꾸민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끌어낸 거죠. 목소리도 노래를 배우면서 알게 된 나의 음역대를 사용했고요. 와인잔을 닦을 때도 남자처럼, 여자처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하선녀가 되어 잔을 닦고 있는 거죠. 물론 초반에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과한 느낌이 들어서 없애려고 노력했어요. 만약 여자 흉내를 내려고 했다면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느꼈을 거예요”
성혁은 ‘어떤 옷을 입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는 말을 썼다. 물리적인 의상에 따라서도 연기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하는 과정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서 나오는 기운은 배우와 배역의 밀착력을 높였다.
성혁(사진=FNC엔터테인먼트 제공)
■ “뻔뻔하게 연기하라”
그가 이렇게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된 계기는 전작 ‘싱글와이프’ 덕분이었다. 찌질하고 뻔뻔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몸을 푸는 법을 배우게 됐다.
“감독님이 너의 모습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보여준 찌질한 모습도 내 안에 있는 모습이었던 거죠. 이 작품을 하면서 에너지를 쓴 게 아니라 오히려 받았어요. 그 에너지로 ‘화유기’를 할 수 있었고요. 그때 느꼈던 자유로움이 하선녀를 연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자연스러운 연기를 고민하면서 편견을 깨게 된 거죠. 어떻게 보일지 ‘설정’을 하지 않아야 해요”
‘싱글와이프’에서 목수 역할을 맡았던 성혁은 연필을 귀에 꽂는 버릇을 토대로, 라면 물을 끓이고 기다리면서 나무젓가락을 귀에 꽂는 등 우러나오는 디테일을 구축해 나갔다. 그 과정을 성혁은 ‘진정성’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뷰 내내 빠짐없이 쌍꺼풀 짙은 눈으로 시선을 마주치던 성혁과 닮아 있는 단어다.
“이제는 초능력자 역할도 잘 할 수 있어요. 동장군과 하선녀 연기할 때도 CG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진짜 물건을 얼리고 악귀를 물리치는 사람인양 뻔뻔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앞으로도 작품 안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을 해나가고 싶어요. 목표는 하나에요. ‘내가 이 작품에서 어떻게 쓰일 것이냐’. 그 몫을 잘 해내고 사람들이 주는 피드백을 원동력 삼아 또 다른 작품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얻는 힘이 나에겐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에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