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이다. KBS2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을 보다 ‘브루터스 리’라는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콧수염에 턱수염을 하고 해골 모양 목걸이를 걸고 가죽 재킷에 조끼를 즐겨 입던 이웃집 아저씨. 바이킹 해적 같은 묵직한 아우라를 풍기는 배우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데스크였던 필자는 후배에게 인터뷰를 명했고, 배우를 만나고 온 기자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더라”며 엄지를 세웠다. 후배가 쓴 기사에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타이틀을 빌려 제목을 달았다. 본명 조원준, 아버지의 이름 그대로를 예명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던 조진웅.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남자. 배우라는 직업에 임하는 결의와 진실하고자 하는 태도가 조.진.웅이라는 세 글자에 서려 있었다.
조진웅을 ‘진하게’ 만날 수 있는 행운은 그로부터 7년 후 찾아왔다. 영화 ‘아가씨’가 칸을 찾았던 2016년 5월. 7년 새 조진웅은 세종이 된 한석규 곁에 호위무사 무휼로 서서 귀여운 매력을 뽐낸 ‘뿌리깊은 나무’, 선배 김혜수와 후배 이제훈과 함께 카리스마를 빛낸 ‘시그널’ 등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성큼 다가섰다. 영화로는 장르, 캐릭터, 국적 가리지 않고 광폭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용의자X’ ‘분노의 윤리학’으로 시동을 걸고, ‘파파로티’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야성미를 뽐내고, ‘끝까지 간다’로 주연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암살’을 통해대중의 기억에 오래 남을 개성적 캐릭터를 만들었고, ‘우리는 형제입니다’ ‘허삼관’ ‘장수상회’로 인간미를 풍긴 뒤였다.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의 이모부 코우즈키로 칸에서 만난 조진웅은 ‘광대론’을 펼쳤다.
“로마의 왕을 웃게 하지 못하면 사자 우리에 던져졌던 광대와 같은 마음자세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연기한 7년, 배우 조진웅의 결의는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배우 지도에 자신의 영역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짐작됐다.
칸에 다녀온 이후 조진웅은 영화 ‘해빙’ ‘대장 김창수’로 단독 주연의 책임을 다했고, ‘독전’ ‘공작’ ‘완벽한 타인’을 통해 아름다운 협업을 선보였다.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의 손현주와 재회한 영화 ‘광대들’을 통해 배우의 소임,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구성해 재미지게 대중의 가슴에 전하는 연기를 호기롭게 소화했다.
그리고 2019년 10월 현재. 조진웅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배우 설경구와 공연한 영화 ‘퍼펙트맨’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외양은 ‘솔약국집 아들들’ 때처럼 독특하게 화려하고, 내적 에너지의 중량감은 한층 묵직하다. 10년의 배우 세월을 톺아본 뒤 조진웅을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만났다. 보통의 사람보다 훨씬 뜨겁고 역동적인 영기를 어떻게 빚었는지를 가장 먼저 물었다.
“음, 영기에 앞서 영화 얘기부터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퍼펙트맨’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지키자고 말하는 영화예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그걸 느꼈어요. 그런데 영기는 머리가 없는 애인지 무식한 건달인지 좋게 얘기하면 순진한 건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인물이에요”
갑자기 필자의 주스 잔을 움켜쥐더니 자신의 입 가까이로 가져간다.
“보통은 ‘이거 마셔 봐도 돼요?’라고 하고 손을 대겠죠. 그런데 영기는 그냥 가져다가 그냥 마시는 인물이에요. (라임을 맞추듯) 영기를, 연기를 빙자해서 그렇게 살아볼 수 있는 연기를 누렸어요. 누가 뭐 시키면 ‘안 해’ 이러면서. 안 해? 이러면 ‘연기인 거야~, 영기인 거야!’ 이러면서”
촬영 내내 영기로, 장마당에서 신나게 한 판 노는 광대처럼 살았던 그때를 전하는 조진웅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연기’와 ‘영기’를 섞은 말들에는 못 말리는 유머와 장난기도 가득.
“영기는 건달인데 결이 있는, 흥이 있는 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급 반전) 영기를 연기하면서 내가 이렇게 우울하게 살았나 싶었어요. 장마당에서 한 판 벌인 광대 같다 하셨지만, 그렇게 보셨으면 너무 다행인 거고, 장수(설경구 분) 형님 모시고 클럽 들어갈 때 이걸(신나서 방방 뛰며 춤추는 동작) 못하겠더라고요. 촬영할 때는 목소리나 소리들이 들어가야 하니까 실제론 클럽 음악소리는 없잖아요. 업다운 펑크 같은 거 듣고 미리 흥 높여가서 연기했어요. 쉽지 않더라고요, 그 텐션(긴장감)을 계속 유지해야 하니까. 음악 없이 추는데, (머리를 감싸 쥐며 웃음) 시련이었어요. 조감독이 동시기사와 얘기하더니 ‘음악, 틀어야겠습니다’ 하길래 ‘아냐 내가 해 볼게’ 했는데. 그랬음에도 음악을 틀어 주는데, 우리 그런 데 감동 받잖아요. ‘야, 놀자~’ 하며 췄고 경구 형님도 좋아하시고”
“신명나게 놀아보자 했어요, 노는 에너지 안 나오면 망할 것 같아서. 여기서부터 망하면 (극장에) 걸리지도 못하겠구나, 하는 마음으로요. 또 찍으라면 또 찍을 수 있어요, 2년도 찍을 수 있어요”
배우에게 자신의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접근했고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를 물으면 그게 누구든 신나한다. 그런 사람들이 배우를 한다. 조진웅은 그 가운데서도 뜨거운 사람인데, ‘퍼펙트맨’을 하며 더욱 뜨거울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더 보였다. 바로 설경구다.
“엄살이긴 합니다. 투블럭 머리 태어나 처음해 보고. 그런 의상, 줘도 안 입어요, 말도 안 돼! 어 근데, 한번 해 보셔라 해서 입었는데…힘이 나! 자신감이 생기고. 어느 순간, 그냥 앉아 있을 때도 나도 모르게 다리를 올리고. 아, 오케이(‘감 왔어’라고 말하듯 핑거스냅). 처음에는 못할 것 같아 소주도 한 병 마시고 시련이 몰려왔었는데 말이죠”
“일단 경구 형님이 잘한다, 잘한다, 예쁘다 호응해 주신 게 큰 힘이 됐어요. 처음에 뵈었을 때 ‘들어가자’ 하며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가 안겼어요. ‘안녕하십니까!’ 이거 아니었어요, 좋아하는 배우니까. 다른 선배 (배우) 형들한테 미안한데, (설경구는) 제 롤모델이기도 하고. 그리고 장수와 영기의 관계는 제가 ‘안녕하십니까’ 이러면 죽은 연기가 돼요”
“경구 형님 처음에는 적잖게 당황하셨죠. 이거 뭐지, 이 새끼 이거 뭐지. 나중에는 ‘온냐, 온냐’ 막내 동생마냥 대해 주셨어요. 설경구라는 배우는 정작 자신은 뭘 안 해도 (상대 배우는) 그 포스에 기가 죽는 사람이에요. 설경구, 최고잖아요. 저는 그러면(기죽으면) 안 되잖아요, 이 캐릭터에 좋지 않아요. 그래서 막 들어간 거죠”
대선배들 얘기가 나오니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이 ‘소년’ 조진웅이 된다.
“다른 선배님들이 나의 롤모델이 아니다 뿐이지 송강호, 최민식, 칫솔질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싶어요. 얼마나 좋겠어, 내 앞에 연기의 교재들이 떡하니. ‘연극영화과는 왜 나왔나, 이것만 봐도 될 것 같아’ 하는 기분 아니겠어요”
“1998년 군 휴가 나왔을 때 ‘지하철 1호선’ 연극을 봤어요. 부산에서 연극하다 군대 갔는데. 입대 전 연출가가 하는 말이 ‘너무 좋은데 뒤에 서, 너무 크니까’. 좋은데 왜 뒤로 가래? 배우는 앞으로 가서 보여 주는 직업인데. 그런데 ‘(지하철) 1호선’ 가니 저랑 등치가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키) 180은 훨씬 넘어, 근데 날라 다녀요. 앞에서 노래하고 다 해, 날라 다녀요.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죠). 퇴장할 때 관객 손잡으며 인사하는데 악수하면서 ‘군인이시네요, 파이팅 하세요’라고 말해 줬어요. 선배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장면이죠”
“제대하고 2000년. ‘나, 저 배우 알아’ 하면서 그때부터 선배님 행적을 찾아보고. 경구 형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좇아가서 보고. ‘요번에 이런 거 할 때 재미나다’ ‘이번엔 무섭다’ 선배님 연기 보며 분석 아닌 분석을 하며 저도 꿈을 키웠죠. 좋은 교보재 참 많아요, 송강호 김윤석 선배님들. 그런데 같이 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다 경구 형님 (‘퍼펙트맨’으로) 진하게 만나서 너무 행복했어요. 닮은 부분도 있고. (하하하) 경규 형 보며 연기해서 당연히 닮은 데 있죠. 어, 이런 것도 나랑 비슷해. 당연하지 롤모델이었는데, 보고 따라했는데(웃음)”
좋은 배우에겐 좋은 본보기가 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들과의 작업에서 조진웅은 뭘 얻는 걸까.
“(손)현주 형은 대의적 명분에 과감히 들이받는 큰형 같고, 경구 형은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고. (최)민식 형님 버티고 계신데 내가 나 혼자 살자고 비릿해질 필요 없고. ‘그러지 말자’는 다짐을 합니다”
‘비릿해진다’는 게 뭘까. 조진웅이 배우로서 경계하는 그것이 궁금했다.
“잇속들을 챙기는 것일 수 있고. 큰 풍파를 되게 아플 것 같으니까 모른 척 피해갈 수도 있는,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거죠. 나는 그러지 말자! 손해 보더라도, 뭔가를 허탈히 잃더라도 소신을 지켜보는 건 어떨까 하는 거죠. 관객들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그래야죠. 그게 다 형들이 하고 있는 것이고요.”
배우 조진웅이 영화 ‘퍼펙트맨’을 통해 얻은 건 무엇일까.
“진선규, 경구 형, 허준호 형님, 김사랑 씨. 모두 처음 작업하는 건데 다 열어 주셨어요. 제가 노는 것에 대해 부담을 안 주시더라고요.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 라고 말해 주셨어요. 연기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하나가 극을 이끄는 걸로 보인다면 그건 그만큼 리액션을 잘해 줘서 완성된 앙상블인건데. (‘퍼펙트맨’에선) 리액션이 완성이 되니까, 말이 되는구나, 좋다!”
“허준호 선배님은 술을 안 드셔요. 제가 술 취했는데 그날 촬영엔 경구 형이 없었어요. ‘야, (허준호 선배님) 몇 호냐?’ 우르르 쳐들어갔어요. 선배님이 좋아하셨어요. ‘사이다라도 짠해 주세요’ 이러며 재미났어요. 옛날 얘기도 해 주시고. 지금 영화 하는 젊은 연출부들 나이가 갓 스물 대여섯, 서른 정도인데 같이 섞여서 이런저런 얘기하시는데 되게 캐주얼하시(격식이 없)더라고요. 경구 형과 영화 ‘실미도’ 출신으로, 인연 어마 어마하고. 사실 그때의 아날로그세대가 가지는 진함이 있어요. 계산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녜요.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박하사탕’ 보고 자란 세대. 멋있고 되게 부러운 분들이에요”
선배들에게 배우며 아직도 성장 중인 배우 조진웅. 그는 2019년 오늘, 자신의 ‘배우 좌표’를 어디쯤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작품) 편수는 늘어 가는데… 1년은 빨리 가고, 벌써 10월이고. 아직 (집은) 전세고. 그런 지점입니다. 아직 갈 길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게 좋고요. 위치를 고민해야 할 때는 아닌 것 같고, 그런 거는 관객 분들이 만들어 주시는 거고요. 대중적 카리스마, 라는 것이 있다고들 하시는데 진짜인가요? 관객 분들께 여쭤 보기도 해요. 연극도 하고 싶고, 정말 해야 될 게 너무 많은데”
“아! 관객 한 분이 몇 년 전에 제 손을 딱 잡으시더니. ‘연극 하는 거 보여 주세요’. ‘아, 그럽시다’ 했는데 아직 못하고 있어요. 좌표를 물으시니 그런 일이 생각나네요. 그런 거 하려고 배우 하는 건데”
“영화 ‘광대들’ 할 때도, ‘퍼펙트맨’ 할 때도 전 즐거워요. 희극을 너무 사랑해요. 코미디 (작품) 있으면 해 보려 해요. 시나리오 들어오면 대부분은 칼, 총, 피. 코미디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요. 경구 형님이 대단한 게 코미디 정말 잘하시거든요. (장수의 캐릭터상) 앉아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좌식 연기, 동공 연기, (자신의 얼굴의 동그라미를 치며) 이 안에 많은 표정으로, 아주 절제되어 있는 연기를 하시더라고요. 그게 경이로웠어요”
조진웅은 스토리텔러다. 극의 이야기와 온도를 관객에게 잘 배달한다. 연출자들이 가지는 자질이다. 감독의 미래는 없을까.
“얼마 전에, 9월초까지 해서 단편영화 연출했어요. 이 이야기의 전말을 한 15~16년 전부터 떠들고 다녔는데(웃음). 내가 한 번 단편이라도 해 봐? 하며 도전한 건데 흥이 나더라고요. 깨달은 건 연출은 사람 할 짓 아니고요(웃음). 스태프가 모여 어떻게 회의해서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장면 만들어 내는지, 그 전체를 쫙 경험해 본 게 정말 좋았어요. 몇 초 몇 초가 이렇게 중요하고, 이렇게 만들어 내는구나! 카메라 뒤에서 이들의 동선을 지켜본 게 처음인데 눈물 날 만큼 울컥 했어요. 저는 연출이 처음이지만 그들은 이 바닥의 베테랑이잖아요. ‘내가 앞으로 연기 더 잘해야지’ 다짐했고요. 내가 작업했던 감독님들, 와 이 양반들이 대단한 분들이었구나 절감했고요. 끝나고 스태프 앞에서 울거나 하진 않았는데 숙소 와서 감격해서 혼자… (우는 듯한 몸짓 재연). 좋은 경험이었어요. 영화 작업이 더 소중해졌습니다”
조진웅이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어 관객 앞에 배우 아닌 ‘감독’으로 설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우선 그가 연출한 단편영화부터 보고 싶다. 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멈출 줄 모르는 ‘배우 조진웅’의 성장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어디까지 자랄까. 잭을 하늘까지 바래다 준 콩나무가 생각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