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 아트리움에 설치된 작가 이불의 대형 설치 작품.
(사진=내미림 기자)

#.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1층 로비에 들어서자, 높은 천장 아래로 시야가 한 번에 트이는 아트리움 중앙에 투명한 풍선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세로 약 2~3미터, 가로 1미터 남짓한 크기의 풍선은 천장 구조물에서 내려온 가느다란 와이어에 고정돼 있다. 하나의 지점에 매달린 구조가 아닌 풍선의 상단과 가장자리를 나눠 지탱하는 방식으로 설치돼 있어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와이어는 격자형 천창과 조명 선 사이로 겹쳐지며 드러나지 않고 풍선 덩어리만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선 내부는 작은 전구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투명한 필름 표면과 겹치면서 각도에 따라 빛이 반사되거나 스며든다. 조명과 자연광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바닥과 벽면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해 12월23일 아모레퍼시픽 서울 용산 세계본사 아트리움에 설치된 작가 이불의 신작 설치 작품 모습이다. 아모레퍼시픽이 문화 프로젝트를 잇달아 선보이며 기업의 정체성 확장에 나서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예술과 문화 경험을 접점으로 한 활동에 적극 나서면서 단순 화장품 제조·판매 기업을 넘어 지역사회와 교류하는 ‘문화 플랫폼’이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5일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작품은 이불이 2015년부터 전개해 온 ‘윌링 두 비 발루너블(Willing To Be Vulnerable)’ 연작 중 하나다.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열망과 이상과 현실, 강인함과 취약함이 공존하는 감정을 풍선 형태의 대형 설치로 구현했다. 시드니 비엔날레와 베를린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등 주요 국제 전시를 통해 소개된 연작으로, 개방적인 아트리움 공간과 맞물리며 부유하는 듯한 시각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이번 본사 아트리움 전시는 ‘아름다움의 문화’를 확장하려는 기업 비전을 바탕으로 한국 동시대 작가의 창조적 실천을 세계적 맥락에서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며 “개방형 구조의 아트리움을 일상적 공간이 아닌 예술적 경험의 장으로 전환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창업주 수집 미술품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의 문화’, 용산 사옥에도 적극 활용 중

아모레퍼시픽의 이 같은 행보는 글로벌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최근 글로벌 명품 브랜드와 대형 리테일 기업들은 미술관 운영과 전시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문화적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제품 경쟁이 평준화되면서 예술·문화 경험을 통해 차별화된 브랜드 서사를 구축하려는 흐름이 뚜렷해진 상황이다. 이에 발맞춰 아모레퍼시픽은 문화 프로젝트를 일회성 마케팅이 아닌 장기 전략으로 삼고 있다.

실제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은 올해 현대미술 소장품 특별전과 미국 현대미술가 조나스 우드 개인전도 개최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본사 공간과 미술관을 동시에 활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는 4월 개막하는 현대미술 소장품 특별전 '챕터 파이브–프롬 더 에이피엠에이 컬렉션)'은 해외 동시대미술의 넓은 스펙트럼을 한자리에서 조망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과 전환을 보여주는 다수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오는 9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나스 우드의 아시아 첫 기획전을 개최한다. 우드는 선명한 색채와 패턴, 평면적 원근법으로 일상과 주변 풍경을 그려낸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본사 아트리움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미술관은 국제 전시 수준의 큐레이션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기업 공간과 문화 콘텐츠를 연계한 운영 구조다.

아모레퍼시픽의 ‘예술·문화 사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바 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고(故) 서성환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하던 박물관을 모태로 한다. 지난 2009년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Amorepacific Museum of Art)’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본격적인 전시 운영 체계를 갖춘 미술관으로 전환됐다. APMA는 ‘일상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열린 공간’을 지향하며 한국 고미술과 국내외 현대미술을 함께 수집·연구·전시하고 있다.

지하 1층 전시실에서는 고미술·현대미술·한국미술을 아우르는 기획전이 열리고, 지상 1~3층으로 이어진 아트리움 1층에는 미술관 로비와 뮤지엄숍, ‘APMA 캐비닛’, 전시도록 라이브러리(apLAP)가 들어서 있다. 하얀 백자를 모티브로 설계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신사옥 1층에 미술관이 자리한 점은 기업·건축·미술관이 하나의 구조로 결합된 사례로 꼽힌다.

현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는 이불의 작품을 포함해 총 세점의 대형 공공미술 작품이 설치돼 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오더디프닝(Overdeepening)’, 레오 빌라리얼의 ‘인피니트 블룸Infinite Bloom)’ 등이 대표적이다. 본사 설계를 맡은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이 공간을 단순한 업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와 교류하는 작은 공동체로 구상했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앞으로도 본사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성과 문화적 가치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