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사진=yg엔터테인먼트)
[뷰어스=남우정 기자] “내 미래가 기대돼요”
연기 경력 35년째인 배우.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고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럼에도 김희애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했다.
“난 좋은 세상을 만났어요. 옛날에 비해서 세상이 바뀌었고 배우들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어요. 점점 전성기 같고 화려해진 느낌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20~30대에 더 우울했어요. 나이는 많지만 지금이 더 밝은 현장이라 좋고 미래가 기대돼요”
데뷔 때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희애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대중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기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또 우아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오랜 시간 광고 모델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 큰 슬럼프 없이 순탄하게 흘러온 것 같지만 김희애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슬럼프가 왜 없었겠어요. 근데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때 왜 그랬나 싶어요. 인생의 통과의례죠. 지금도 매일 좋기만 한 건 아니에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크고 작은 시련이 있고. 그래도 시련이 있었던 게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죠”
연기를 통해 실제 삶에서 해볼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해봤지만 김희애는 인생을 알아야 그에 맞는 연기가 나온다고 믿었다. 손에 물을 묻히지도 않으면서 생활연기를 해내는 건 쉽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럿 경험 중 결혼은 김희애의 배우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결혼 전 스스로를 미완성이라고 말했다.
김희애(사진=yg엔터테인먼트)
“여자는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결혼 전엔 풋내 나는 인간이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쭉 전진하고 배우면서 연기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렸을 땐 더 열악했어요. 그땐 피하고 싶고 놀고만 싶었는데 점점 일이 소중하고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해요. 철이 든 거죠”
특히 ‘밀회’나 ‘미세스캅’ 등 최근 작품들 속 강인한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결혼과 출산이 김희애의 삶에 영향을 끼쳤듯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는지 묻자 김희애는 기혼 여성에겐 선택권이 크지 않은 현실을 언급했다.
“결혼 후, 이 나이에 작품, 캐릭터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아요. 더 예쁘고 젊은 배우에게 배역이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 때 그 때 여건에 따라서 작품이 들어오는 것에 감사해요. 그 중에서 재미가 있으면 해요. 내가 할 만 한 가치가 있으면 재미가 없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구나’라고 싶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망설이게 돼요. 한 문장이라도 건질만하면 하죠. 그렇지 않으면 10년에 하나밖에 못 할 거예요(웃음)”
김희애(사진=yg엔터테인먼트)
■ “진심을 가지고 해야 했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 ‘허스토리’는 김희애에게, 대중들에게 또 한 번 강렬한 기억을 남길 작품이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23번이나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와 싸운 위안부 할머니들의 ‘관부 재판’ 실화를 다룬 ‘허스토리’에서 김희애는 할머니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사업가 문정숙 역을 맡았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조근 조근 말을 이어가던 김희애가 영화에선 할머니들을 위해 호통을 치고 무례한 사람에겐 돌직구도 서슴지 않는다. 우아함의 대명사인 김희애의 걸크러쉬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캐릭터다.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이번엔 더 달랐던 역할이에요. 부산 사투리, 일본어, 할머니들과 같이 해야 하는 신들이 있어서 배우로는 도전이었어요. 앞으로 나아가고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쌓아온 커리어가 있는데 망신당하겠구나 싶었어요. 사투리 때문에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역사를 알게 됐고 그래서 최대한 진심을 가지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연기도 잘해야 했고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 회장이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의 실제 모델이다. 김희애는 실존 인물을 참고해 헤어, 스타일 등 외적인 변화부터 부산 사투리에 일본어까지 완벽 마스터했다. 스스로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말한 김희애지만 촬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대사를 외울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김희애의 배우인생 최대의 도전이었다.
“김문숙 할머니가 일본어를 굉장히 잘 하신대요. 처음엔 발음대로 한글로 써놓고 외우면 될 줄 알았는데 일본어에도 리듬이 있고 띄어쓰기가 있더라고요. 재판에선 더 어필해서 해야 되는 부분이 있으니 힘들었죠. 기록 사진도 보고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결정적으로 부산 사투리가 있었죠. 정말 안 되겠어서 서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되나 생각까지 했어요. 지금까지 사투리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부산 출신 배우들이 해놓은 게 많아서 쉽게 생각을 했는데 그게 함정이었죠”
김희애(사진=yg엔터테인먼트)
그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는 게 여실히 전해졌다. ‘허스토리’라는 작품이 가진 의미를 알기 때문에 김희애는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맘을 다잡았다. 결국 마지막 촬영 후 김희애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배우 인생 35년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어적인 게 너무 힘들어서 잘 쓰던 한국말도 잊어버릴 정도였어요. 빨리 끝내길 학수고대했죠. 촬영 다 끝나고 울었어요. 이렇게 오래 연기를 했는데 촬영 끝내고 울었던 적음 처음이에요. 부담감이 나름 있었던 것 같아요.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분장실에 들어갔는데 막 눈물이 나왔어요”
작품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허스토리’는 김희애에게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됐다.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인 적도, 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연기를 한 것도 처음이다.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작품이지만 후회는 남지 않았다.
“연기자로 터닝 포인트가 된 것만으로 좋아요. 내 한계를 실험해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도전이었지만 힘든 만큼 배우로서 보람이 있어요. 후회 없이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민규동 감독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 했을까 싶기도 해요. 정말 애를 많이 쓰셨죠. 덕분에 좋은 작품을 만났고 모두 할머니를 위해서 하나가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