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 '순하군 안성탕면' 5개입 제품 패키지. 사진=김성준 기자
최근 식품업계에서 매운맛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매운맛 하면 빠질 수 없는 라면도 예외가 아니죠. 라면 대표주자인 농심도 주력제품인 신라면의 매운맛을 더 강화하는 한편 매운맛을 콘셉트로 한 신제품도 계속 출시했습니다. 그런데 농심에서 이 ‘매운맛 트렌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안성탕면 출시 4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순하군 안성탕면’ 입니다.
사실 안성탕면은 기존에도 ‘맵다’라고 하긴 어려운 라면이었습니다. 매운맛을 나타내는 척도인 스코빌 지수가 600SHU으로, 경쟁사 제품인 진라면 순한맛(640SHU), 삼양라면(950SHU)보다도 낮았죠. ‘순하군 안성탕면’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고춧가루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스코빌지수 ‘0’을 구현한 건데요. 이론상으로는 매운맛이 전혀 없는 라면인 셈입니다.
제품은 포장에서부터 ‘순한맛’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탕에는 계란이 연상되는 노란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했고, 조리예 사진을 제외하면 매운맛을 상징하는 붉은색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제품 국물이 붉은 편이지만, 이마저도 파프리카 분말을 사용해 색을 냈다고 합니다. 제품 내용물은 기존 안성탕면과 마찬가지로 면과 분말스프 두 개로만 구성됐는데요. 스프에는 매운맛분말과 함께 사골우거지 분말 등이 빠진 대신 치킨된장베이스와 치킨엑기스분말 등이 추가됐습니다. 칠리풍미분말과 후추가루, 마늘추출분말 등은 그대로 포함됐습니다.
라면맛의 핵심인 분말스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겉보기에는 여느 라면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주황색 분말스프 사이로 안성탕면 특유의 미역 건더기와 함께 새로 추가된 해물맛볼이 눈에 띄는 정도입니다. 다만 매운향이 사라져서인지 라면과는 결이 다른 독특한 향신료 냄새가 강하게 풍겼습니다. 라면을 끓인 뒤에는 고약하게 느껴질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라면 냄새 사이로 은은하게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순하군 안성탕면'을 조리한 모습. 사진=김성준 기자
조리는 다른 재료를 별도로 추가하지 않고 제품 후면에 안내된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스프와 마찬가지로 조리된 모습만 보면 기존 라면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국물은 안성탕면 특유의 구수한 맛과 비슷합니다. 면 역시 기존 제품과 동일해 식감이나 맛에서 별다른 차별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특이한 부분은 분명 매워야 할 것 같은 맛인데도 혀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각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와닿았던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매운맛의 빈자리는 닭육수의 감칠맛이 채워주면서 전체적으로 진한 맛을 냅니다. 동시에 각종 향신료 첨가물이 매콤하고 얼큰한 맛을 흉내 내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기존 안성탕면의 맛을 잘 살렸습니다. 그래도 매운맛의 빈자리가 완벽히 가려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익숙한 맛인데도 얼얼함이 사라져서 그런지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매운맛이 사라진 자리를 비집고 나오는 짠맛과 느끼한 맛도 아쉬운 점입니다. 처음엔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라면을 반 정도 먹은 뒤부터는 유탕면 특유의 느끼함 때문에 면발 한 젓가락마다 김치로 손이 갔습니다. 국물도 먹을수록 짜게 느껴져서 국물보다 물을 더 많이 마시게 됐습니다. 그대로 먹기보다는 계란이나 파 등을 첨가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차라리 건면을 사용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농심은 매운맛을 강조한 ‘신라면 더 레드’를 정식 출시한 데 이어 반대로 매운맛을 쏙 뺀 ‘순하군 안성탕면’을 선보이며 세분화된 소비자 입맛을 공략한다는 계획입니다. 실제로 매운 음식을 잘 못 먹거나 매운맛 유행에 피로를 느끼는 소비자가 적지 않은 만큼, 제품 다양화는 당연한 수순일지 모릅니다. ‘맵찔이(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을 칭하는 신조어)’ 중 한 명으로서 제품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점은 분명 반가운 소식입니다.
다만 기존 ‘순한맛’ 제품들도 시장 지위를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운맛 제로’에 매력을 느낄 소비자가 얼마나 많을지는 의문입니다. 매운맛이 부담스러운 어린아이나 노년층에게 권하기에도 나트륨 함량이 너무 높다는 점이 걸림돌이죠. 매운맛을 달고 살았던 국내 소비자들에게 농심의 과감한 선택이 얼마나 통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