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S(주가연계증권)는 쉽게 설명하면 '내기'다. 이기면 돈을 벌고, 지면 잃는다. 내기의 조건은 대략 이렇다. 특정 주가지수(혹은 종목)가 반토막만 안나면 은행 예적금 이자의 서너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단 한번이라도 지수가 반토막 나면 원금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ELS는 도박과도 비슷하다. 단 깨질 확률은 낮은 도박이랄까. 물론 한번 깨졌을땐 엄청난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평시라면 6개월 조기상환 때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원금과 높은 이자. 이것만한 금융상품 찾기도 만만찮은 게 현실이다. 중독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ELS에 대해 '안하면 안했지 한번 하면 계속하게 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오래되기도 했다. ELS 국내 첫 출시 시점은 2003년 2월이다.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시장에서 스무해를 꿋꿋이 살아남았고 단골 손님도 많다.
이번에 만기가 도래한 ELS의 기초자산인 홍콩H지수 역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지수다. 지수의 편입종목도 개선됐다. 과거 은행이나 건설 위주의 포트폴리오는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 등 중국의 우량기업들로 바뀌었다.
상품성만 놓고 보면 다소 불합리한 구조인 것은 맞다. 예컨대 주식은 평등하다. 위와 아래가 모두 열려 있다. 얼마나 오를지, 얼마나 내릴지 알 수 없다. 오른만큼 이익이 나고, 내린만큼 손실을 본다. 채권은 안전한 편이다. 위아래가 다 막혀 있다. 원금손실 우려도 최소화했지만 수익률도 제한돼 있다.
반면 ELS는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받을 수 있지만 하방이 활짝 열려 있다. 약간의 수익을 위해 터질 가능성은 낮지만 리스크를 안고가야 한다. 세상이 평화롭고 경제가 우상향일땐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최근 20~30년 굴곡의 한국 경제와 금융사를 떠올리면 결코 추천하기 쉽지만은 않은 상품이다. 그럼에도 찾는 이들, 특히 단골 고객이 많다는 건 상당수 투자자들에게 그만큼 쏠쏠한 수익을 안겨줬다는 의미다.
그런 ELS가 최근 금융권 화두다. 내년 초 만기를 앞둔 홍콩H지수 연계 ELS의 대규모 손실이 예고됐다. 8조원짜리 시한폭탄, 제2의 DLF/사모펀드 사태 도래 등의 보도가 줄을 잇는다. 2021년 전후로 팔았던 상품 중 상당수가 내년 상반기 만기를 앞두고 이대로 가면 투자자들 손실 규모가 5조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해당 상품은 대부분 은행들이 취급했고 그 중 KB은행이 절반 가량을 팔았다.
연초이후 은행을 두고 공공재→돈잔치→종노릇→독과점이라며 잇달아 날을 세웠던 대통령의 발언. 이에 바짝 긴장한 금융당국의 공세.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거듭 살펴야 하는 여론까지. 이번 ELS 사태에 대한 금융당국의 행보는 예상대로 거침이 없다. 금융감독원은 주요 은행과 증권사들에 대한 현장조사를 꼼꼼하게 진행 중이다. 일단 분위기는 불판(불완전판매)으로 모아진다. 은행들 역시 과거 금융사고로 금융지주 수장까지 교체된 기억이 있는 만큼 긴장감은 최대치까지 올라왔다.
과연 당국은 과거 DLF(파생결합펀드)나 사모펀드 사태처럼 불판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금융사고를 수차례 겪으며 금융당국은 고위험 상품 판매 가이드라인을 한껏 높였다. 은행이나 증권사들도 이에 호응했다. 상품 가입시 사인과 녹취는 물론 문제가 될만한 불판 증거를 남겨놨을리 만무하다는 게 안팎의 중론이다.
사실 이번 ELS 이슈는 앞선 DLF와 사모펀드 사고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미국 등 해외 국채금리와 연계돼 대규모 손실을 냈던 DLF의 경우 당시로선 미국 등 해외 주요국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 전환할 것이란 전망을 그 누구도 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보니 금융회사들은 상품 판매시 안일한 사고에 머물렀고 리스크관리와 이후 대응도 서툴렀다. 결국 불완전판매라는 굴레에 빠졌다. 잘못했다.
라임과 옵티머스로 대표되는 사모펀드 사태는 한마디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투자대상에서부터 수익률 및 리스크관리, 판매 과정 모든 부문이 편법, 위법이었다. 고객들로선 도저히 미리 인지하기 어려웠던 금융사기다. 조사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될 정도로 의혹도 많고 후폭풍도 거셌다. 결국 모든 손실 책임은 일반 투자자들이 져야했다. 금융회사는 신뢰를 잃었다. 금융소비자 보호의 중요성을 거듭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최근 ELS 사태는 이들 사건과는 결이 다르다. DLF처럼 생소하거나 예측불허의 금융상품도, 사모펀드처럼 내부자 공모로 인한 사기사건도 아니다. 국내 출시된 지도 20년이고 지수형이 나온 것도 10년이 넘었다. 수차례 혹은 수십차례 투자해 쏠쏠한 수익을 챙겼던 이들이 대부분 투자했던 상품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100번 시도해서 99번 성공했는데 1번 실패했다. 이를 금융회사가 책임지라고 여론에 묻어가는 눈치빠른 투자자들도 속속 나올 태세다. 뱅커가 권유해 재가입했다고 해서 책임을 판매사로 떠넘길 사안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와 불완전판매 이슈로만 몰아갈 사안은 아닌 듯하다.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몫이다. 과거 수익률이 미래 수익률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과거 갖고 있던 주식이 깨지면 증권사 지점에 와서 난동을 부렸던 고객도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 유독 금융상품 사고는 끊임이 없다. 사실 금융상품은 포장만 바꿨을뿐 주식과 연계된 것이 대부분이다. 현물 주식만 위험하고 금융상품은 덜 위험하다는 투자자들의 인식 자체도 곱씹어 생각해볼 문제다.
확증편향. 사람들은 자기가 한번 옳다고 믿는 생각은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투자자들 역시 듣고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듣기 싫은건 잊으려는 성향이 있다. 아무리 제도를 뜯어고치고 시스템을 보완해도 투자자 스스로 점검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게 금융회사란 사실을 우리는 수차례 금융사고를 겪으며 깨닫지 않았나. 그런만큼 이익은 내가 취하고 손실은 금융회사에게 떠넘기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자칫 당국이 보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경우 자본시장 근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은행 역시 더이상 도박 성향의 상품 취급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설명할 수도, 전망할 수도 없는 위험상품을 팔 이유도, 명분도 없다. 이는 좀 더 리스크를 테이킹할 수 있는 금융사들의 몫이다. 이를 위해 은행들은 고객투자성향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 고금리 상품 판매관련 인센티브 제도 역시 손질해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한가지. 수많은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이 내년초 수조원의 ELS 손실을 낼 것이란 걸 이미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터지면 들어올 것이다. 홍콩H지수는 떨어질만큼 떨어졌다. 내년 이머징마켓 전망도 나쁘지 않다. 중국도 경기부양책에 힘을 싣는다. 홍콩H지수의 하방보단 상방이 열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 시점 금감원은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기관장(이복원 금융감독원장)은 특정은행을 범죄자로 규정짓는 듯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결국 국내 은행들은 농협은행을 시작으로 ELS 판매 중단 조치를 내놓고 있다. 증권사 등 여타 금융회사 역시 당분간 당국 눈치를 보며 경계태세로 전환하는 분위기다. 결국 재주는 곰(한국)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외국인)이 가져가게 생겼다. 하긴 이런 게 자본시장이고 투자시장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융수사를 몇차례 해본 경험만으로 한국의 금융업을 섭렵한듯 조사도 끝나지 않은 사안에 대한 결론을 자신있게 떠벌리는 금융감독 수장의 확증편향적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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