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조용병 전 신한금융그룹 회장(현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은 최종 후보 PT 면접까지 마친 직후 돌연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역대 최대 실적을 구가하며 3연임이 유력했던 그였기에 당시 금융권 안팎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조 회장 스스로 사퇴 발표 직전까지 3연임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터라 당시 금융권에선 당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거란 추측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다만 당사자가 함구하고 당국이 발뺌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특검이 진행되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당시 ‘금융권 물갈이’ 정황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냅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공식 선거 캠프 외에 여러 비선 조직을 가동했고, 그 조직에선 작성자를 알 수 없는 그럴싸한 보고서(살생부)가 양산돼 정권의 공식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 회장의 경우 전 정권인 문재인 정부 핵심 인사들과의 친분이 문제가 됐습니다. 최근 ‘김건희 특검’에선 대통령실이 금융지주 고위직 인선에 관여한 정황도 수사 중입니다.
수사 범위는 인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집사 게이트’에 금융회사들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공교롭게도 신한금융은 여기에도 엮여 있습니다. 신한은행이 김건희 여사 측근 김예성 씨가 재직했던 IMS모빌리티에 30억원을 투자한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특검은 현재 신한은행의 IMS모빌리티 투자와 진 회장과의 연결고리가 있는지, 정권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투자가 진행된 것은 아닌지 등을 조사 중입니다.
무도하기 짝이 없는 윤석열 정부와의 악연으로 신한금융의 구설수는 현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이 출시한 배달 플랫폼 ‘땡겨요’의 쿠폰이 성남시에 집중 살포됐다는 소문이 지난달 퍼진 것인데요. 내년 3월 연임을 앞두고 진옥동 회장이 이재명 정부 핵심 라인들이 연관된 성남시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풍문이었습니다. 이런 ‘찌라시’에 신한금융 측도 이례적으로 공식 반박 자료를 내고 “작성자 및 최초 유포자에 대해서는 민·형사 소송을 포함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성남시에 쿠폰을 집중 발행한 적도 없고, 직원 강제 동원 사실도 없다는 '사실무근' 해명과 함께.
이런 와중에 이재명 정부는 은행의 ‘전당포식’ 영업을 비판하며 ‘금융의 대전환’을 업계에 강력 주문합니다. 부동산과 예금에 쏠려 있는 자금을 첨단산업, 스타트업 등 경제성장 분야로 이동시키는 이른바 ‘생산적 금융’에 적극 나서달라는 요청입니다. 진옥동 회장이 이끄는 신한금융도 적극 화답하고 나섰습니다.
최근 창립 기념행사에서 진 회장은 “우리 사회의 성장을 북돋는 이타적인 역할을 적극 수행하는 생산적 금융을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지난 10일 열린 150조원 국민성장펀드 보고대회에선 4대 금융지주 회장 가운데 유일하게 참석해 “담보 위주의 쉬운 영업을 해 왔다는 국민적 비난을 엄중히 받아들인다”며 정권의 문제의식에 동감하고 반성하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는 정부가 요청하고 민간이 화답하는 아름다운 광경으로 비칠 법도 하지만 정권에 휘둘린 금융권의 흑역사가 요란하고 유구하기에 색안경 끼지 않고 선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 또한 우리 현실입니다. 사실 3년 전 조용병 회장의 연임이 외압으로 좌절되지 않았다면 신한금융은 현재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 전 회장은 재임 시절 신한금융의 글로벌화에 엄청 공을 들였습니다. 어피니티, 베어링 등 글로벌 사모펀드를 끌어들여 재일교포 중심의 지배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내부가 아닌, 외부 요인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용병 회장이 연임을 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권이 민간의 자율경영을 침해해 회사가 추구해 온 DNA와 방향성을 확 틀어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공론화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바람직하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융권에 외압을 가했던 정권에서 ‘은행지주·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관행(Best Practice)’이 만들어졌습니다. 외압 방지책은 이미 수립된 셈입니다. 2023년 12월 마련된 이 가이드라인에 맞춰 신한금융도 ‘지배구조 내부규범’을 정비했습니다.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과 마찬가지로 진옥동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 끝납니다. 신한금융은 통상 회장 임기 만료 4개월 전에 승계 절차를 개시해 왔습니다. 오는 11월 새로운 회장 선임 작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당국의 ‘지배구조 모범관행’에 맞춰 개정된 내부규정에 따라 처음 CEO 선발 작업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들리는 바로는 진옥동 회장의 연임 도전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인데요. 내·외부 간섭이나 압력 없이 후보들 간 공정한 경쟁이 펼쳐졌으면 좋겠습니다. 신한금융 이사회 역시 안팎의 각종 부당한 간섭을 철저히 막고 선발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우리나라 은행지주의 지배구조 선진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