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강령 중 경제(혁신성장과 민주적 시장경제) 부문 내용은 총 10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첫번째는 혁신성장 강화, 두번째는 민주적 시장경제 확립이다. 혁신성장 강화의 핵심 내용은 창업생태계 조성과 성장사다리 구축이다. 민주적 시장경제 확립의 경우 경제력 집중문제 해결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경제민주화를 완성하고 성장잠재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재벌개혁, 건전 경영문화 조성, 시장질서 확립, 금융혁신, 금산분리 원칙 견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자료=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사람처럼 기업도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태어나 전성기를 누리다 쇠퇴합니다. 사람에게 전성기가 젊음이라면, 기업의 전성기는 호황입니다. 영원한 젊음이 없듯, 영원한 호황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은 예외 없이 늙고 병들어 죽지만 기업은 노력 여하에 따라 다시 호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성장 동력 확보, 신사업 진출에 성공하면 그렇습니다. 보통 기업의 수명은 창업가의 전성기인 20~30년을 넘기기 어렵지만 가업을 승계한 일부 가족 기업은 100년, 200년 수명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재벌 체제가 구축된 한국에선 유독 기업들의 수명 연장 욕구가 강합니다. 문제는 기업이 주식회사라는 점입니다. 한 명이 아닌 다수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체제입니다. 오래전 왕국의 주인은 왕 한 명이지만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다수의 국민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재벌은 민주공화국에서 주식회사를 운영함에도 왕처럼 행세하려 합니다. 보유한 지분만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를 개인 소유 회사로 여기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총수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하면 회사의 이익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생겨났고, 한때 ‘국장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재벌이 이런 무소불위의 기업 왕국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독재 체제의 영향이 큽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1970년대 한정된 자원을 소수의 기업인에게 몰아줬던 군부는 그 대가로 천문학적인 불법 비자금을 받습니다. 1997년 대법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선고한 추징금만 2629억원. 노 대통령 딸인 노소영 씨가 최근 이혼 소송에서 해당 추징금과는 별도로 300억원(현재 가치 3000억원 이상)의 비자금이 SK그룹에 전달됐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 재추징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왕국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당시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도 왕(군부)의 묵인 하에 기업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문어발 확장에 필요한 돈은 차관, 융자 등 모두 ‘남의 돈’으로 충당했습니다.
1987년 독재가 끝나고 민주공화국 시대가 열렸으므로 재벌 왕국도 해체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 하지만 정치민주화가 곧바로 경제민주화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흘렀습니다. 전두환을 이은 노태우 정부에서도 정경유착은 이어졌고, 김영삼 정부에선 ‘신경제’라는 이름으로 재벌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그 결과 외환위기가 터져 온 국민이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지요. 위기를 기회 삼아 경제민주화를 달성할 절호의 찬스였음에도 DJP연합으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관료들 역시 퇴출이 마땅한 부실기업들을 상대적으로 튼튼한 또 다른 기업(재벌)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재벌 체제’는 외환위기 이후 더 공고해집니다. 2010년대 들어 경제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이유입니다.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방법은 정치민주화와 일맥상통합니다. 민주공화국의 최대 발명품인 주식회사를 주식회사답게 운영하도록 하면 됩니다. 보유한 지분만큼만 권한을 행사토록 하고, 이사회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법과 제도를 제대로 정비하면 됩니다. 이런 민주적 토대가 쌓이면 ‘문어발 왕정’은 자연스레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관련 기사 : [강대권의 시시각각] 주식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괴리가 큽니다.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의 총수 일가 평균 지분율은 3.5%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내부 출자 구조를 통해 실질 의결권은 60%에 달합니다. 고작 3~4%의 지분을 갖고 문어발 경영을 하며 수십 개 회사의 의사결정을 독단적으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죠. 이사회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총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수기 역할에 충실합니다. 총수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중복상장, 자사주, 사모펀드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회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정을 해도 회사의 공동 소유자(비지배주주)는 대처할 수단이 사실상 전무합니다.
이를 바로잡아 보겠다며 정부와 여당은 1~2차 상법 개정에 이어 3차 상법 개정을 추진 중입니다. 상법을 개정하는 이유는 재벌 왕국의 제왕적 경영을 막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상법을 개정하는 동일한 주체가 다른 한편에서는 금산분리 완화를 추진합니다. 내세우는 핵심 이유는 잠재성장률 향상을 위한 첨단전략산업 육성입니다. 뭔가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게 정리하면, 정부 여당 내에서 제왕적 경영을 견제하는 정책과 부추기는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며 충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해 금투세(금융투자소득세) 유예와 시행을 놓고 당론을 결정하지 못해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상황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자본시장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재벌의 제왕적 경영 때문에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발생했다’는 말에는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금산분리 때문에 잠재성장률이 떨어졌다’는 말에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합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필두로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한국의 잠재성장률 추락 원인을 구조개혁 부재에서 찾습니다. 교육개혁, 노동개혁 둘 중 하나만 성공해도 잠재성장률에 상당한 반전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양식 있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보다 구조개혁과 경제민주화가 더 무겁고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물론 불합리한 규제가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급변하는데 금산분리가 만고불변의 진리일 순 없습니다. 그때는 맞았어도 지금은 틀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극화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경제 현실에서 금산분리를 불합리한 규제라 단정짓는 것이 아직은 섣부른 주장같아 보입니다. 오히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등 일각에선 금산분리가 앞으로 더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벌은 여전히 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재벌이 금융을 탐내는 이유는 왕국의 건설과 방어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돈으로만 영토를 확장하긴 어렵습니다. 금융회사의 고객 돈을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경영에 실패해 위기가 닥쳤을 때도 탈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삼성그룹이 삼성생명 고객 돈으로 반도체 투자에 나서고, 삼성자동차 실패 때 금융계열사 자금이 총동원된 상황을 떠올려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삼성, 현대차, 한화 등은 지주회사 전환을 차일피일 미루며 금융회사들을 소유하고 있는데, 먼저 지주회사로 전환한 SK, LG, 롯데 등은 금융회사들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후자의 그룹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AI 시대를 맞아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하는 SK그룹의 불만이 큰 게 사실입니다. 최태원 회장이 앞장서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촉구하는 배경입니다. 공정위의 직무 유기로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지주회사로 전환한 재벌에 금융회사를 안기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는 재벌을 하루빨리 지주회사로 전환시키는 게 맞을까요.
정부와 여당은 만일 전자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면 당 강령에 적시된 ‘경제민주화’와 ‘금산분리 원칙’부터 포기해야 합니다. 기업이 성장해야 잠재성장률이 오르는 건 맞는 말입니다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대로 두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생산적 금융’을 빼놓고 이재명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잠재성장률 반등을 위해서는 AI 등 미래전략산업 육성이 필요하고, 미래전략산업을 육성하려면 ‘생산적 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을 위해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한지 가급적 편견 없이 몇몇 쟁점을 도마 위에 올려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