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롯데지주)

롯데가 지난 26일 발표한 2026년 정기 인사에서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닌 ‘사업의 좌표’를 바꾸는 결과를 내놨다. 총 36개 계열사 중 20명 대표이사가 교체됐고 무엇보다 신동빈 롯데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부회장단을 일괄 퇴진시켰다. 인사 폭만 놓고 보면 크고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번 인사의 본질은 '사람의 물갈이' 보단 '경영 방식의 물갈이'였다.

그동안 롯데 유통 부문은 탄탄한 자산, 넓은 네트워크, 매장 운영 노하우를 기반으로 ‘관리형 경영’을 펼쳐 왔다. 하지만 유통의 게임은 이미 바뀌었다. 오프라인 점포는 더 이상 유통의 중심이 아니며, 유통은 이제 ‘상품 판매업’이 아닌 ‘고객 데이터 기반의 서비스업’, 나아가 ‘콘텐츠 사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런데 롯데의 리더십은 이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왔다.

이번 인사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 인사다. 과거의 안정형 리더 대신 실험형 리더가, 점포 관리형 인물 대신 전환 경험이 있는 인물이 전면에 나섰다. 실무형·실행력 중심의 젊은 리더들을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정현석 롯데백화점 신임 대표는 FRL코리아에서 브랜드·콘텐츠 결합을 통해 수익성 회복을 이끈 인물이다. ‘점장 출신’이 아니라, ‘업을 다시 설계해 본’ 사람이다. 롯데월드몰이나 부산점과 같은 공간 운영이 아니라, 공간을 브랜드 경험 플랫폼으로 설계하는 관점을 가진 리더다.

롯데마트와 슈퍼, e커머스를 맡는 차우철·추대식 대표의 발탁도 상징적이다. 이들은 내부 출신이지만 기존 통념의 ‘롯데식 관리자’와 다르다. 이들은 비용을 줄이기보다 사업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을 맡아왔던 실무형 전략가였다. ‘이마트 따라가기’ 전략 대신, 롯데만의 옴니커머스 플랫폼을 만드는 ‘재설계형 인사’다.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이동우(롯데지주), 이영구(식품군), 김상현(유통군), 박현철(건설) 부회장 등 그룹의 구조조정과 해외사업 확대, 재무 안정화 등을 이끌어온 전략 인물들을 부회장들을 전원 퇴진시킨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롯데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부회장직을 모두 없앤 데 더해 '고 이인원 →황각규→이동우'으로 이어지던 '신동빈의 남자', '신동빈의 복심'의 수식어도 종결시켰다는 점이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의 지휘봉을 맡은 이후 그의 지척에는 항상 2인자가 존재했다. 앞선 고 신격호 선대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차이점은 '신격호-손가락 경영'vs'신동빈-경청'으로 평가됐던 '오른팔'을 대하는 자세였다. 신 회장은 어떤 사업을 시작할때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쉽게 건너가지 않는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신중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경영회의에서도 항상 경청하며 존칭어를 사용할 만큼 주변인들을 활용하며 독단적 판단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2인자를 없애고 9년간 유지한 사업 총괄 체제(BU→헤드쿼터)를 폐지하는 대신 '플랫한' 조직 문화를 구축해 각 계열사간 책임경영과 빠른 의사결정을 선택했다. 실행력 강화 중심의 조직 변화를 이룬 것이다. 지주사에 신설된 ‘전략컨트롤 조직’ 역시 기존의 정책본부처럼 조정·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룹의 투자 방향,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 계열사간 시너지 설계까지 관여하는 실행형 컨트롤타워다. 다시 말해 앞으로 롯데의 전략은 각 계열사가 따로 움직이는 ‘매장형 유통’이 아니라 지주 중심으로 설계되는 ‘플랫폼형 유통’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롯데는 늦었지만, 방향은 정확하다. 유통업의 경쟁자는 더 이상 백화점업체나 할인점 업체가 아니다. 롯데의 진짜 경쟁자는 네이버, 쿠팡, SSG, 나아가 메타와 구글이다. 쇼핑을 넘어 ‘경험, 콘텐츠, 연결’로 가치가 이동하는 시장에서는 점포보다 데이터, 매장 방문객보다 고객 행동 패턴, 매출보다 고객 재방문율이 핵심 지표가 된다. 롯데는 그걸 이제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통은 숫자를 보고 판단하는 산업이 아니라 흐름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산업이다. 이번 인사는 흐름이 바뀌는 순간에 나온, 롯데의 첫 번째 진짜 ‘실험’이다.

조직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유통의 본질은 공간도, 점포도, 상품도 아니다. 유통의 본질은 결국 ‘소비자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제 롯데의 새 리더들이 소비자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전략적 감각과 속도까지 갖추고 있다면, 이번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롯데 유통의 리셋(Reset)'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