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연합뉴스
고등학교 시절 선택과목으로 ‘공업’을 배웠습니다. 요즘 제 취향으로 보면 ‘농업’이 더 적성에 맞았겠지만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던 선택과목이었던 탓에 심란한 마음으로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전혀 관심 없던 ‘자동차 엔진의 구조와 원리’를 달달 외우면서….
사실 ‘흡입-압축-폭발-배기’로 이어지는 자동차 엔진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성인이 돼 운전면허를 따는 데 도움이 전혀 안 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운전을 해 오면서 그 지식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느껴진 것도 아닙니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인 지식 정도랄까.
도로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퍼졌다고 해서 운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요청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명한 대처법이죠.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긴급출동 서비스는 없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이화여대 학생들의 신랑감 1순위가 택시 운전사였던 시절엔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운전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자동차의 구조를 모르면 운전 자체가 허용되지 않던 시대, 대변혁을 몰고 온 회사가 일본의 토요타입니다. ‘자동차의 구조나 원리 따위는 몰라도 좋다, 액셀레이터와 브레이크만 구별할 줄 알면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하고 굴릴 수 있게 하겠다’는 전략으로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자동차와 운전이 여성에게 보편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회사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 내연기관 원리 몰라도 운전 지장 없어
금융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글자 그대로 ‘금전을 융통하는 일’입니다. 돈이 오가는 과정에 이자가 붙죠. 이 쉽고, 간단하고, 명료한 원리가 현대사회에선 잘 통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렵고, 복잡하고, 불투명한 것 투성이인 존재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파생상품이나 금융공학의 영역에 진입하면 전문가들조차도 이해가 어려워 혀를 내두를 정도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을 모르면 불편한 일이 많습니다. 특히나 고령화 시대 노동소득 못지않게 자본소득이 중요해진 시대에 결코 '알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인 지식’일 수 없습니다. 선진국일수록 금융교육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대두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정규 교과 과정에 ‘금융’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금융교육에 성공했다는 나라 또한 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자동차 교육’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슬기로운 금융생활' 위한 적정 지식은?
‘슬기로운 자동차 생활’을 위해 우리는 자동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야 할까. 20세기라면 내연기관 원리 정도는 이해하는 게 적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21세기 그렇게까지 깊이 알 필요가 있을까. 수리와 정비는 전문 정비사에게 맡기면 됩니다.
같은 질문을 금융 분야에 적용해 볼까요. ‘슬기로운 금융 생활’을 위해 우리는 금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야 할까. 누구는 파생상품의 영역까지 알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는 가게에서 거스름돈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자,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홍콩 H지수 기반 ELS(주가연계증권) 자율배상 이슈와 관련해 우리의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인 게 적절할까. 해당 상품의 수익 발생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요점만 대충 이해하면 될까요.
개인적인 견해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합니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모르면 큰 일 나는 것도 많습니다.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매일 수없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감당해야 할 모든 일에 동일한 가치와 가중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성향과 취향에 따라 우선순위를 두고 높은 순위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금융의 영역으로 대상을 좁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출 이자를 이해하는 것과 파생상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교과목으로 비유하면 대출 이자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과목, 파생상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선택과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금융지식의 적정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겠죠.
■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선택권이 줄어든다
금융당국이 ELS 상품을 은행이 팔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업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 블러’ 시대에 이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더 튼튼하게 고치는 게 맞는데, 아예 외양간을 없애고 소를 키우지 말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
‘적정 수준의 지식’과 관련해 슬기로운 자동차 생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운전자가 모두 자동차 정비 지식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주변의 많은 정비소들 중 어느 정비소가 더 실력이 좋고 정직한지만 파악하면 되는 것이죠. 정부는 국민들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정비소 평가 정보를 제공하는 선에서 공적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금융의 영역에서도 소비자들은 어느 은행이 더 실력이 좋고 정직한지만 파악하면 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금융교육(운전면허 같은)을 전제로, 소비자의 선택권이 최대한 보장되는 시스템 말이죠. 국가가 일일이 완전판매 여부를 검사하는 시스템은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소비자들에게 한정된 선택지가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금융교육 선진국으로 꼽히는 호주는 ‘투 트랙’으로 금융교육을 진행합니다. 하나는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핵심 금융지식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준별, 단계별로 다양한 온·오프 교육체계를 갖춰 개인의 관심도나 필요도에 따라 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는 일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92년 내놓은 ‘붉은돼지(紅豚)’에서 주인공 포르코 로소(Porco Rosso)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포르코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