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블랙머니' 스틸
정지영 감독이 희대의 금융 스캔들을 다룬 ‘블랙머니’로 7년 만에 돌아왔다. ‘남영동 1985’의 집요함과 ‘부러진 화살’의 영화적 재미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블랙머니’가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 잊혀진 사건을 상기시킬 수 있을지 관심이다.
13일 개봉한 ‘블랙머니’는 수사를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막 가는 ‘막프로’ 양민혁 검사(조진웅 분)가 자신이 조사를 담당한 피의자의 자살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고,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다 거대한 금융 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소재로 한 ‘블랙머니’는 복잡한 사건 개요를 이해시키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너무 쉽게 설명하면 본질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대로 보여주면 이해가 어렵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블랙머니’가 선택한 방식은 주인공 캐릭터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제 문제에 대해 관객만큼 관심이 없었던 양민혁 검사의 시선은 배경 지식이 없는 관객들까지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성추행 검사라는 누명을 벗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수사를 시작한 양민혁이 변하는 성장 스토리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실체를 쫓아가는 스릴러적인 문법을 활용해 영화적 재미를 높이기도 했다.
이처럼 ‘블랙머니’는 정지영 감독의 인장이 뚜렷하게 새겨진 영화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 잊혀져선 안 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들을 꾸준히 영화화해 온 정 감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는 물론, 재미를 위한 정 감독의 노력도 뚜렷하게 담겨 있다.
사진=영화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스틸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뒤 부당 해고된 김명호 전 교수의 이야기를 다룬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의 기능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고집스러우면서도 위트 있는 주인공 김경호를 따라가다 보면 의도는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법의 허점을 제대로 파고들며 결과를 뒤집는 과정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남영동 1985’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실제 에피소드를 각색한 영화다. 주인공 캐릭터가 남영동의 고문실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직접적이고 또 끈질기게 담아내며 그때 그 시절의 부조리함을 아프게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좁은 고문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면으로 응시해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이 흐른다.
무거운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또 흥미 있게 풀어내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 감독의 분명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블랙머니’는 가장 뜨겁다. 실제 사건의 주인공을 중심에 둔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에서는 영화적 재미는 충분하되, 감정을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일명 신파적인 장면은 없었다. 일정 수준의 거리를 유지했음에도 실화가 주는 무게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울림과 여운이 충분했던 것이다.
‘블랙머니’는 경제 비리, 나아가 비리를 가능케 한 기득권 카르텔의 민낯까지 파헤치는, 서사가 방대한 영화였다.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풀 가상의 인물 양민혁의 활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가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뒤 변모하는 과정 자체가 관객들의 시선과 일치해야 했고, 그래서 양민혁은 유난히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해당 사건에 대한 억울함과 부조리를 직접 호소하는 강렬한 연설 장면도 마다하지 않으며 보는 이들을 자극시킨다.
그래서 ‘블랙머니’의 전개 방식이 도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블랙머니’의 강렬한 양민혁이 어려운 경제 비리를 대중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내기 위한 맞춤형 방식이 됐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7년 만에 더 뜨거운 에너지를 품고 돌아온 정 감독이 많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