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에서 주연배우의 상황을 드러내거나 사건을 고조시키는 배우들이 있다. 코러스 혹은 움직임, 동작으로 극에 생동감을 더하면서 뮤지컬을 돋보이게 하는 ‘앙상블’ 배우들을 주목한다. 국내에선 앙상블 배우들을 ‘주연이 되지 못한 배우’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편집자주
사진=임상희 배우 제공
지난 16일 초연한 창작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예비 관객들은 개막 전 그림자가 없는 주인공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내비쳤다. 제작진은 오랜 시간 고민과 회의를 거듭하며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면서 무대 바닥을 하이글로시로 처리해 바닥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특히 하이글로시로 처리한 바닥에는 인물이나 사물의 상이 맺혀 무대는 더욱 깊어 보이고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또 고정된 벽 대신 이동이 가능한 LED 벽과 영상, 조명을 사용해 무대 위 배우들의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게 했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잃은 페터 슐레밀을 제외하고 그림자를 갖고 있어야 하는 다른 인물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갓상블(God+Ensemble 합성어)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앙상블 배우들이 빛을 발한다. 특히 주인공인 페터 슐레밀의 그림자를 담당하고 있는 배우 임상희의 움직임은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다.
◇ 배우 ‘임상희’는...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임상희 입니다. 저는 한양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뮤지컬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좋은 결과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2018년)의 댄서로 데뷔, 이후 뮤지컬 ‘킹아더’(2019년) 앙상블로 참여했으며 지금은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앙상블을 맡고 있습니다.
Q. 이번 작품을 연습하던 중에 크게 울었던 적이 있다고요?
A. 네. 2막의 마지막 장면을 연습했던 중이었어요. 페터 슐레밀 역의 최민우 배우가 ‘날 부르네’(rep) 넘버를 부르며 쳐다보는데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제가 페터의 그림자 역할을 맡고 있다 보니 페터와 마주치는 순간 완전히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되어 펑펑 울었거든요. 근데 주변에 함께 있던 배우들이 저 때문에 다 같이 울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저와 함께 울어주는 동료들을 보며 ‘아, 나도 몰랐는데 내가 이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들며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동료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Q.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참 중요하죠. 그렇다면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일까요.
A. 저도 아직은 이 질문의 정답이 무엇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지금의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는 ‘항상 무대에 설 수 있음에 감사하고, 성실한 배우’인 것 같습니다.
Q. 페터의 그림자 역을 맡으셨죠. 인상 깊게 봤습니다.
A. 저는 표면적으로는 페터 슐레밀의 그림자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의 인간성을 대변하는 역할입니다. 페터가 자신의 그림자(인간성)보다 돈이나 명예를 갈구하다 시련을 맞이하게 되잖아요. 그가 시련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지날 때, 저는 때로는 우아하고 고귀한 대상으로 때로는 처절하고 고통 받는 대상임을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 ‘앙상블’이라는 직업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앙상블 배우들은 각 도시의 시민이나 귀족으로 등장하고 때로는 그림자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로 무대에 오른다. 도시의 시민일 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과 그의 그림자가 짝을 이루어 무대에 올라 그림자를 잃고 홀로 서 있는 페터 슐레밀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짝을 이루어 등장한 이들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며 무대를 누비는데 단순히 사람과 그림자가 동작을 맞추는 것을 넘어서서 캐릭터가 느끼는 놀람, 두려움 등의 감정이 담긴 격렬한 안무를 통해 극의 드라마틱한 매력을 고조시킨다.
그림자를 잃은 페터 슐레밀을 압박하는 페터 내면의 그림자로 등장할 때면 완벽한 호흡의 칼 같이 맞는 동작으로 보는 이들마저 숨 막히게 만들고, 인간을 유혹하는 그레이맨의 수하 또는 그레이맨이 수집한 그림자로 등장할 때면 객석을 집어 삼킬 듯한 강렬함으로 시각적 충격과 환희를 동시에 선사한다.
Q. 뮤지컬에서 앙상블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A. 뮤지컬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숨은 조력자! 앙상블이 있기 때문에 무대가 더욱 풍성해지고 보다 깊이 있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Q.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앙상블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에 힘든 점이 있다면요?
A.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큰 것 같아요. 우리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극이 진행될수록 변해가는 페터 슐레밀의 감정선이거든요. 저는 그의 그림자인 만큼 페터의 감정 변화에 따라 움직임이나 얼굴 표정으로 캐릭터의 상태를 표현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 부분을 작가님과 연출님 그리고 안무 감독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잘 표현하고 있는지 걱정되고, 여전히 제가 좀 더 고민해야 할 과제인 것 같아요.
Q. 앙상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떤 것 같나요?
A. 저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이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회사에 다니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진다는 것과는 달라 보일 수는 있겠구나 싶어요. 하지만 저를 포함해 모든 배우들이 그렇듯 그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각자의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운동선수는 운동을 열심히 하듯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해 공부 선수가 되는 거고, 저는 뮤지컬 선수로서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거죠. 답변을 쓰다 보니 궁금해지네요. 여러분은 어떤 분야의 선수이신가요?
Q. 관객들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바라실까요.
A. 매년 달라지는 다짐처럼 저도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항상 달라지는 것 같아요. 지금은 관객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대가로 한 거래라는 서사와 상징을 토대로 할 뿐 캐릭터 구성 및 이야기 전개 방식 등은 무대극에 맞게 완전히 새롭게 쓰였다.
페터 슐레밀 역에는 양지원·장지후·최민우, 그레이맨 역에는 김찬호·조형균·박규원, 리나 마이어 역에 여은·전예지, 토마스 융 역에 조남희·지혜근, 그리고 15명의 앙상블(스윙 포함)이 함께 무대를 꾸민다.
공연은 11월 16일부터 2020년 2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