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운동회' 스틸컷 (사진=리틀빅픽처스)
[뷰어스=김동민 기자] 한 가족은 그 가족이 속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노인과 청·장년, 청소년과 어린이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구성원들이 폭넓게 존재하고, 그들 각자가 지닌 생각 또한 천차만별이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개인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산다는 건 생각해 보면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운동회'에 등장하는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는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 할아버지와 집안일에 치여 여자로서의 삶을 잊은 엄마가 있고, 만년 과장인 아빠와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삼촌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바로 무남독녀 9살 여자아이다.
‘운동회’는 이제 막 짝사랑을 시작한 초등학생 승희(김수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승희는 외국 물을 먹은 전학생 남자아이에게 푹 빠져 있지만 현실은 매일 ‘먹보’ 짝꿍에게 시달리는 신세다. 이런 그는 운동회 2인3각 종목에 출전해 이기면 짝꿍을 바꿔주겠다는 담임선생님의 제안을 받는다. 이에 짝사랑남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연습에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영화 '운동회' 스틸컷 (사진=리틀빅픽처스)
영화는 승희가 운동회를 앞두고 헤쳐나가야 할 관문과 더불어 다른 가족 개개인의 문제들을 교차적으로 배치한다. 할아버지에겐 ‘아버지연합’이란 의문의 단체가, 엄마에겐 봉사단체에서 만난 훈남 이사장이, 아빠에겐 돌연 해고를 통보한 회사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삼촌에게 밀린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악덕 고용주도 빠지지 않는다. 이들 모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시급하다. 각자 스스로에게 닥친 사건에 대처하며 정작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제댈 돌보지 못한다. 그야말로 텅 비어있는 3대 가족의 모습을 날카롭게 조명하는 셈이다.
이런 주인공들이 영화 후반부 우연한 계기로 한데 모이는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할아버지, 오랜만에 여자로서의 설렘을 느끼는 엄마, 일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아빠, 그리고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 삼촌까지. 어딘가 비뚤어진 사회의 이해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은 어느 순간 그 사회가 만들어낸 ‘적’을 마주한다. 그 적들 사이에서 재발견되는 건 미처 몰랐던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운동회’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그렇게 터무니없으면서도 기시감을 자아내며 적지 않은 울림을 남긴다.
다분히 시트콤적인 색채를 지닌 ‘운동회’를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로케이션과 미장셴들은 현실 속 소시민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구수한 사투리로 이어지는 배우들의 대사 하나하나 역시 친근하기 이를 데 없다. 때문에 ‘스타’라곤 하나도 없는 이 영화는, 바로 그 덕분에 ‘가족’으로 뭉뚱그려진 서사를 효과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 '운동회' 스틸컷 (사진=리틀빅픽처스)
‘운동회’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진태 감독은 우연히 신문을 통해 접한 중소기업 해직노동자들의 복직시위현장 사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만약 아수라장 같은 시위 현장에서 가족들이 각각 어용단체 노인와 해직 노동자, 진보단체 아주머니, 구사대 청년으로 만난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한 것이다. 감독의 상상대로, 누구라도 언젠가 핏대를 세워가며 맞서 싸우는 상대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마주할 지 모른다. 만약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이왕이면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어떨까. 3월 2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