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JTBC 방송화면)
TV를 보다 보면 지금 화면에 담긴 내용들이 과연 사실과 얼마나 가까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사소하지만 궁금하고, 궁금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면과 발언들. TV 프로그램 속 내용을 ‘팩트체크’ 해본다. -편집자주
[뷰어스=노윤정 기자]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연출 곽정환·극본 문유석) 4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랑 일하는 동안에는 연애니 결혼이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일에만 전념하세요” 배석판사가 부임한 첫 날 부장판사에게 들은 말이다.
부장판사 성공충(차순배)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배석판사들에게 당연한 듯 희생을 강요하는 인물이다. 야근과 주말 출근을 당연하게 여긴다. 배석판사의 퇴근 시간을 감시하기까지 한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그의 배석판사 홍은지(차수연)는 임신 사실조차 밝히지 못했고, 성공충이 하달하는 과중한 업무를 무리하게 소화하다가 결국 아이를 잃게 된다.
‘미스 함무라비’에서 그려진 홍은지의 사연은 그저 드라마 속 에피소드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성공충처럼 후배와 부하 직원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일신의 성공을 이루려는 상사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홍은지가 겪은 고충 역시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 법하다. 이처럼 ‘미스 함무라비’ 속 홍은지의 유산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였기에 더욱 많은 이들이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했다.
■ 홍은지의 유산,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극 중 홍은지의 유산은 상사와 과도한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했다. 이처럼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하는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산업재해(산재)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을 비롯한 통칭 노동법을 통해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했을 경우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 중 홍은지, 나아가 실제 회사에서 홍은지와 유사한 일을 겪은 노동자의 경우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노무법인 평안 이일우 대표 노무사는 “산업재해 성립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신청인이) 노동자여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일 이상의 요양을 요하는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홍은지의 경우) 유산이 업무와의 연관성이 있느냐, 산재법에서 보는 4일 이상의 요양을 요하는 경우에 해당하느냐가 관건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유산이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회사, 상사, 업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유산의 원인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 전문의의 진단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유산 원인이 산모의 유전적인 기질이나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회사에서 받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있다는 전문의 진단 말이다. 이와 관련 이일우 노무사는 “상시적으로 이루어진 연장 근무와 같은 과중한 업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유산과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산모의 몸 상태가 4일 이상의 요양을 요한다는 전문의 소견이 있다면 충분히 산재 인정이 가능해 보인다. 즉, 업무와의 연관성이 인정되고 유산으로 인해서 4일 이상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산재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극 중 성공충이 “여판사들 말이야, 일 좀 할 만하면 결혼한다고 휴가가고, 조금 지나면 임신했다고 출산휴가 간다. 이 바쁜 민사 합의부에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버리니까 전투를 할 수가 없다”고 말한 대목 역시 “산재 인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발언들 역시 여성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지 않나”라고 문제시했으며, “더 자세히 살펴봐야하겠지만, 부장판사의 발언은 남녀고용평등법의 위반 여부도 따져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진=JTBC 방송화면)
■ 현직 노무사가 말하는 산재 신청 방법
만약 극 중 홍은지가 유산을 한 것이 아니라 조산, 혹은 미숙아나 장애아를 출산한 경우에도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이일우 노무사는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유산됐을 경우 산재 인정이 좀 더 쉬울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장애아를 출산했을 경우에는 업무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쉽지 않을 거다”라고 전했다.
산재 신청 시 의사의 소견서가 중요 자료가 되는데, 미숙아나 장애아 출산의 경우에는 소견서를 써주는 의사의 부담감이 커진다는 설명이다. 산재로 인정되면 미숙아, 장애아 출산으로 인한 부모의 정신적 충격, 아이가 자라면서 겪을 물질적, 정신적 손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이일우 노무사는 “미숙아, 장애아 출산이 회사에서 지시한 업무 때문이라는 점이 인정된다면 부모가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 유산은 산모만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미숙아, 장애아 출산은 손해배상 청구와 결부되기 때문에 의사가 소견서를 써주기 쉽지 않을 거다”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다만 올해부터 바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과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 징수등에 관한 법률의 시행령 및 시행규칙에 따라 산재 신청 방법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해졌다. 이일우 노무사는 “2017년까지는 산재 신청을 할 때 사업주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노동자들이 병원에 가서 소견서를 받으려고 하면 회사의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산재 신청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018년부터는 산재 신청서에서 사업주 확인란 자체를 없애버렸다. 이제 노동자가 병원에서 가서 산업재해보상보험 소견서를 받고, 신청서에 본인 서명만 기입해서 제출하면 된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다. 회사마다 산재 관리 번호가 부여된다. 그 관리 번호만 알면 병원에서 전산으로 바로 산재 신청할 수 있다. 만약 관리 번호를 모를 경우에는 근로복지공단 가입 지원부에 전화해서 문의하면 알려준다. 그 번호를 병원의 산재 담당자에게 알려주고 산재 신청을 요청하면 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