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록키호러쇼' 콜롬비아 역의 전예지와 송유택(사진=알앤디웍스)
[뷰어스=한수진 기자] 국내 공연계에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이 화두로 떠올랐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뮤지컬 ‘광화문연가’ ‘에어포트 베이비’ ‘록키호러쇼’,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까지. 이 공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장르나 소재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배역 설정에 남녀의 구분을 없앤 것이다.
국내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지난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부터다. 당시 이지나 연출은 헤롯왕 역할에 여자인 김영주를 캐스팅했다. 여자가 헤롯왕 역할을 맡은 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처음이었다. 과거 미디어콜에서 김영주는 “어떻게 이렇게 기발한 발상을 한 건지 놀랍다”며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생경한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바다. 그러나 이젠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현재 공연되고 있는 ‘록키호러쇼’는 여자 배우가 전담했던 콜롬비아 역할을 남녀로 더블캐스팅 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도 5명의 배우가 1인 다역을 맡아 60여명의 등장인물을 연기하는데 남녀배우를 고루 캐스팅했다.
수년이 흐른 현재 ‘젠더 프리 캐스팅’은 국내에서 조금씩 발을 넓혀가고 있다. 캐릭터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다양한 접근을 위해 배역을 무성(無性)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년전부터 ‘젠더 프리 캐스팅’과 배역의 성별을 바꾸는 ‘젠더 벤딩(Gender-bending) 캐스팅’이 추세가 됐다.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선 국가적으로 ‘젠더 프리 캐스팅’ 문화 정착에 앞장서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젠더리스’ ‘젠더프리’가 트렌드가 된 것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 원종원 뮤지컬평론가는 “외국의 경우 남녀의 문제를 넘어 다양한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적 추세는 젠더와 문화가 결합되어 있을 때 인권 즉 기본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 월하 역의 정성화와 차지연(사진=CJ E&M)
■ 국내 ‘젠더 프리 캐스팅’ 세계적 추세 따라가려면..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단순히 배역의 성별을 없애는 것에만 의의를 두지 않는다. 젠더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하고 공연계의 성차별적 구조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국내 공연계의 주된 소비층이 여자이다 보니 남자배우를 중심으로 한 극이 정착돼 왔다. 뮤지컬 ‘바넘-위대한 쇼맨’ ‘웃는 남자’ ‘프랑켄슈타인’ 등 현재 공연되고 있는 대작만 살펴봐도 대부분 남성 중심 공연이다. 업계 관계자들도 애초 여자가 남자와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면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이러한 틀을 깨는 중요한 도구로 작용한다.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기존 주요 캐릭터에 여성의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관객 입장에서도 남녀에 따라 극 이입에 차별을 둘 수 있어 두 배의 재미가 따른다. 같은 배역이라 할지라도 연기하는 인물에 따라 천차만별의 캐릭터가 탄생한다. 이런 면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은 보다 더 넓은 캐릭터 확립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아직 국내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해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젠더 프리에 대한 캐릭터 인지가 부족할뿐더러, 극의 중심 캐릭터가 아닌 작은 역할로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 평론가는 “‘젠더 프리 캐스팅’ 자체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가 성에 대한 인식을 교정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걸 통해 목격될 수 있는 다양한 연출의 진폭을 넓혀가는 게 문화예술이다. 특히 모든 배역을 ‘젠더 프리 캐스팅’ 하는 건 좋은 현상은 아니다. 이러한 캐스팅이 관객의 흥미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높은 완성도를 갖췄을 때 이뤄져야 한다”며 “현재 국내를 글로벌 추세와 비교해 본다면 단시한적이라고 본다. 세계적으로 인종, 성정체성, 성소수자 문제가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젠 그런 영역까지 논의를 확산해야 된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