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SBS '여우각시별', MBC '배드파파' '내 뒤에 테리우스' 포스터)
[뷰어스=노윤정 기자] 위기에 빠진 남성을 구하기 위해 멋지게 등장하는 여주인공. 수많은 히어로물에 자주 등장하는 패턴에서 성별만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참 낯설다. 우리에게 사람들을 돕고 구하는 히로인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운 TV 드라마가 다수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일 방영을 시작한 SBS ‘여우각시별’과 MBC ‘배드파파’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초인적 힘을 가진 주인공이 극을 이끈다. 정확히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과 사람들을 돕는 히어로로 그려진다.
‘배드파파’ 속 유지철(장혁)은 돈을 벌기 위해 신약 임상 실험에 참여한 뒤 초인적인 괴력을 얻게 되고 그 능력을 이용해 사랑하는 아내와 딸, 가정을 지키려 한다. ‘여우각시별’의 이수연(이제훈)은 교통사고로 웨어러블 보행보조물을 착용하게 된 인물로 한여름(채수빈)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면 보조물이 있는 오른팔로 괴력을 발휘해 도움을 준다. 히어로물은 아니지만 MBC ‘내 뒤에 테리우스’ 역시 출중한 능력을 가진 전직 국정원 블랙 요원 김본(소지섭)이 평범한 여주인공 고애린(정인선)과 그녀의 아이들을 지키는 이야기를 담는다. 여전히 드라마 속에서 히어로 역할은 남성의 전유물이고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성을 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리는 작품들이 점차 수를 늘려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인물은 아직 드문 실정이다. 국내 드라마 중 히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지난해 방영한 JTBC ‘힘쎈여자 도봉순’이 떠오르는 정도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히로인물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마저 로맨틱코미디 성격이 강했기에 히로인물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극이 전개될수록 주인공 도봉순(박보영)을 그리는 방식이 히로인의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재벌가 아들이자 회사 대표 안민혁(박형식)과의 러브스토리 속 여주인공으로 묘사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영웅적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위기의 순간 달려온 남주인공에게 도움을 받는 여주인공'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진=JTBC '힘쎈여자 도봉순', 영화 '원더우먼' '캡틴 마블' 포스터)
■ 더 많은 히로인이 필요한 이유
히로인 캐릭터의 부족은 비단 국내 미디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히어로물을 탄생시켜온 미국의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와 마블 스튜디오만 보더라도 히로인 솔로 무비를 만드는 데 긴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워너브라더스가 만든 DC의 히로인 솔로 무비는 지난해 개봉한 ‘원더우먼’이 최초다. 마블 스튜디오 사상 첫 히로인 솔로 무비인 ‘캡틴 마블’은 2019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황. 그동안 워너브라더스와 마블 스튜디오에서 배트맨, 슈퍼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수많은 남성 히어로 캐릭터 솔로 무비를 만들어온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웅으로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가 부족한 현실 속에서 미디어가 더 많은 히로인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남성이 여성을 구하는 판타지를 담고 있는 히어로물의 범람은 왜곡된 성역할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또 여성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롤모델이 부족해다는 이유가 뒤따른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성역할과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어질수록 여성의 주체성 신장은 멀어져 가는 역효과를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8일 미국 여성미디어센터(WMC)가 발표한 연구 결과도 미디어에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여성미디어센터가 BBC 아메리카와 함께 작업한 논문 ‘초능력을 가진 소녀들: SF 슈퍼 히어로 장르에서의 여성 묘사’(원제: Superpowering girls-Female representation in the sci/fi superhero genre)는 미디어에서의 여성 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여성 응답자 중 58%가 히로인 캐릭터를 보면서 자신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A majority of Girls-58%- strongly agree that female sci-fi/ superheroes make them feel like they can achieve anything they put their mind to).
동시에 10~19세 여성 응답자 중 다수(이하 괄호 속 숫자는 응답자 비율)가 TV 드라마와 영화 속에 롤모델로 삼을 여성 캐릭터(63%), 공감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65%), 강한 여성 캐릭터(65%)가 부족하다고 답한 터. “여성을 볼 수 없으면 그 여성이 될 수도 없다”(If you can‘t see her, you can’t be her)는 새라 바넷 BBC 아메리카 회장의 말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히로인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이 기존에 남성들이 전유하다시피 하던 장르의 주인공이 되는 사례는 점점 늘고 있다. 이런 흐름 안에서 초인적이고 강인한 능력을 가진 히로인의 모습도 더 자주 등장하길 바란다.